내가 집을 둔 주소지는 속초이지만 요즘 생활 주 무대는 고성군 명파리 지나 민통선 북쪽이다. 민통선 북쪽에 작은 밭과 산림 경영지가 있는데 기르는 작물들 살피러 하루가 멀다 하고 빈번히 오간다. 까치봉 주변으로는 토종벌 몇 통을 놓고 돌보고 있는데 기술이 없어서 그런지 애를 써봐야 채밀 실적은 연간 10kg도 못 된다. 어린 시절 산골에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시던 걸 먼발치에서 어깨너머로 본 것이 전부라 막상 내가 하려니 영 힘에 부친다. 왕벌 떼가 습격하지 않나 벌레가 생기지 않나 걱정만 많았고 경사 심한 산을 오르내리기도 버겁다. 노력한 것만큼 소득도 없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이라곤 온통 떡갈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숲이다.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은 대부분 어른 팔뚝, 아이들 장딴지 정도로 굵은데 높이는 하늘을 찌른다. 저마다 키 자랑하기 바쁜데 높은 것은 30m까지 곧추섰고 가지는 별로 없다. 군데군데 아름드리나무들이 휘어있거나 쓰러져있는가 하면 중간이 부러져 고사목이 된 것도 있다. 그 밑바닥에는 군데군데 검푸른 작은 바위들이 누워있는데 대게는 푸른 이끼류를 뒤집어쓰고 있다. 군데군데 이름 모를 풀들과 키 작은 관목들이 뒤섞여 있다. 이런 무가공의 원시림과 처녀림이 이 광활한 천연 생태계의 진정한 주인이다. 거기서 품어져 나오는 맑은 공기는 생명의 원기요 생명의 에너지다.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름 모를 작은 꽃들 형형색색 장관
요즘 사방천지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환경보호와 생태보전은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간의 탐욕으로 마구잡이로 변형하고 파괴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자연과 환경을 이제 와서 뒤늦게 살려보겠다고 나섰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연의 무한하고 오묘한 질서와 작동원리에 비춰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는 단기간 내에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애 내에 뭔가를 이루어내고자 하지만 대자연의 시간표는 그보다 훨씬 길게 마련이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의 질서와 그만의 작동원리에 따르도록 놔두는 게 환경보호요 생태보전의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이도백하 숲의 바다를 통과한 버스는 마침내 백두 천지가 굽어보는 널찍한 광장에 멈춰 선다. 매표소를 지나 천문봉을 목표로 오르기 시작하는데 말 그대로 구불구불 구절양장이다. 활엽수림인 잡목지대를 지나니 곧 아름드리 자작나무 숲을 지나간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위로 곧게 자라지 못하고 뒤틀리고 옆으로 눕고 땅으로 가지를 늘어트린 채 울퉁불퉁 그 모양새와 몰골이 말이 아니다. 고산지대 특유의 기후와 모진 바람 탓이겠지. 악조건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생존의 결과물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구석구석 불거지고 튀어나온 힘살과 근육들마저 가엾기는커녕 수목의 의연함과 고고함을 돋보이게 하는 의도된 장치 같아 보인다.
어느새 자작나무 숲은 보이지 않고 회백의 화산토와 화산석 뿐이다. 수목한계점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화산지대다. 백두 천지의 원 모습에 한층 가까워진 것 같다. 화산토와 화산석을 뒤덮은 초지 위에는 이름도 모를 작은 꽃들이 한 가득이다. 강한 산바람을 타고 흔들리는데 붉은색, 분홍색, 노란색, 흰색, 초록색으로 형형색색 장관이다. 쫓아가서 살포시 잡아주고 정성껏 쓰다듬어주고 싶구나. 아! 청순하고 고결한 그리고 앙증맞은 너의 자태에 나의 모든 영혼을 넘겨주고 싶구나!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차의 진동을 전신으로 느끼면서 좌석 안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편함과 긴장으로 경직된 다리에 쥐가 날 무렵 드디어 천문봉 9부 능선에 다다랐다. 하차하려고 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데 오싹하고 한기가 엄습한다. 떨리는 몸과 혼미한 정신을 다잡기 위해 큰 숨을 토해냈다.
천문봉 정상, 백두 천지가 한 눈에
백두 천지를 우러러 쳐다보니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아래로 굽어 살펴보니 온통 회백색의 화산토다. 한 발짝 한 발짝 사람들 틈에 끼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비좁은 통로 양옆으로 서로 먼저 오르겠다고 아귀다툼하며 밀치고 밀리는 모습이 전쟁터 피란민들의 군상이 따로 없다. 세 줄 네 줄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무리가 긴 꼬리를 물고 구불구불 저쪽 능선 봉우리까지 이어진다. 드디어 천문봉 정상. 불연 듯 백두 천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백두 천지님! 이렇게 팔순 노인이 되어 다시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자애롭게 어루만져주시는 홍은지덕(弘恩之德)에 늘 감읍할 따름입니다. 인간 세상에 홍익의 큰 이념이 충만하고 모두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내려주세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하듯 축원문을 중얼거린다. 가슴은 울렁울렁 격랑을 치고 눈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계속>
임덕수, 경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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