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차에 올라 긴 구릉을 빠져나가니 좌우 연도의 지형이 크고 넓게 터지면서 작은 산 능선들과 들판들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능선과 계곡에는 짙고 푸른 수목들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경연을 하고 주변 들판에는 온통 옥수수다. 옥수수 밭 뒤로 많게는 수백 호까지 옹기종기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마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도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파종만 잘하면 사람 손 없이도 잘 자라는 게 옥수수라지만 자기 밭의 생육상태라도 보러오기 마련인데 그 넓은 들판에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인다니 어찌된 영문일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끝없이 이어진 넓고 광활한 들판과 산 능선 계곡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생각이 떠오른다. 용정에서 화룡에 이르기까지 저 광대무변의 농경지는 누가 언제 어떻게 개간하였을까?
지금부터 백이삼십 년 전인 1890년부터 1920년대에 한반도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침략과 탄압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그 인근의 목단강, 길림 그리고 연해주였다. 남부여대(男負女戴). 우리 선조들의 대 이주가 시작되었다. 산림을 벌채해 경작지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농토를 일구며 손과 발은 터지고 먹지 못하여 부황으로 얼굴과 몸뚱이는 부어올랐다.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지 못하여 눈꺼풀이 푹 꺼진 어린 자식들을 나무그늘 아래 놓아두고 부모들은 허기를 이겨가며 한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새로운 땅에서 자식들은 절대 배곯지 않고 키우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1992년 내가 처음으로 백두 천지에 오르기 위해 훈춘을 방문하였을 당시 김민웅 훈춘시장이 직접 들려준 자신의 조부모 세대의 이야기였다.
위대한 선조들의 후예, 조선족 동포들
강인한 인내심, 근면과 성실, 용기와 도전정신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우리 선조들은 마치 돌로 바위를 부수듯이 불굴의 의지로 이뤄냈다. 쾌거 중의 쾌거이다. 연길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방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 바로 그 위대한 선조들의 후예인 한민족(韓民族)이다. 세월은 흘러 벌써 4대, 5대로 이어진다. 오늘날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들 가운데 조선족 동포들의 중국 내 위상과 생활상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타민족들이 선망하며 존경하는 대상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인연으로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자치주를 방문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동감할 만한 일이지만 가보지 않았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생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2024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냉철한 시각으로 진단해보자. 1945년 해방과 함께 곧이어 몰아닥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으로 국토는 양분되고 모든 전통적 가치와 생활양식들이 실종되고 파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 서구적 가치가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삶의 형태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발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승승장구,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세계 8위의 과학기술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명실공히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 국민 개개인의 의식과 정신은 얼마나 충만하고 건강한가? 자신있게 긍정하기에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위험 요소들이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고 부정적으로 만들고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자.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분열과 대립, 반목과 질시, 혼란과 무질서, 나태와 사행심 등이 야기한 모순과 갈등 요소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극복 불가능한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들을 척결하지 못하면 공든 탑이 무너지듯 우리 공동체는 순식간에 사상누각처럼 붕괴될 수 있다. 인류 문명사를 회고해 볼 때 유심(唯心)과 유물(唯物), 이 두 기둥이 함께 견실하게 작동하거나 유심이 유물을 앞서 이끌어갈 때는 문화와 문명이 융창했다. 하지만 유물이 유심을 앞질러 이끌어갈 때 그 문화와 문명은 쇠퇴하거나 붕괴됐던 수많은 사례들을 역사가 실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물질을 견인해야지 물질이 정신을 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이 가야 마음이 간다고들 말하지만 그릇된 생각이다. 마음이 없이 간 물질은 진정으로 간 게 아니다. 반드시 나중에 탈이 나게 마련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물질만능주의가 지극히 당연한 이치마저 잊게 만든다. 우리 대한민국과 한민족이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선도하고 이끄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면 이런 성찰과 정신적 재무장이 선결 과제일 것이다. 상념에 사로잡힌 사이 차는 어느덧 이도백하(二道白河)로 접어든다. 길 왼쪽 연도에는 지명을 크게 적은 안내판이 걸려있다. 저 멀리 아득한 하늘과 맞닿은 크고 작은 능선들이 좌우로 길게 뻗어 흘러가는데 그 자취가 긴 산맥을 그리면서 짙은 안개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몇 차례씩 반복한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백두 천지님!”
별안간 안개구름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그 앞에 초대형 삼각형을 세워놓은 듯 거대한 산봉우리가 홀연히 나타난다. 푸른 하늘과 맞대어 검푸르게 보이는 봉우리 주변으로 안개구름이 마구 피어오른다. 눈을 비비고 침을 꼴깍 삼키면서 다시 한 번 크게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는 순간, 그 신비로운 산봉우리는 안개구름 속으로 돌연 자취를 감춘다. 문득 띵하며 머리를 스쳐 가는 바로 그것! 저것이 바로 백두 천지로구나! 얻어맞기라고 한 듯 머리는 띵하고 가슴은 울먹울먹한 데 두 눈에서는 스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백두 천지님!”하고 긴 한숨이 토해진다. 고개 들어 쳐다보니 희끗희끗 보이는가 싶더니 또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두세 번 이렇게 홀연홀몰 하나 싶더니 짙은 안개구름 속으로 그 고고한 모습을 영영 감추고 만다.
아담한 주택들과 제법 높은 건물들을 지나고 차는 곧 이도백하 교외로 방향을 튼다. 좌우엔 울울창창(鬱鬱蒼蒼)한 미인송 군락이 펼쳐진다. 크고 작은 이름 모를 수목들이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을 안고 경연하듯 미풍 속에서 번쩍번쩍 펄럭인다. 참으로 장관이다. 저거야말로 생명의 약동(躍動) 아닐까? 포장한 좁은 도로와 비포장 흙길이 잇달아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나 싶더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길옆으로 좁고 긴 초지가 보이고 그 초지 위에는 한 평 남짓한 감시초소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홀로 서 있다. 바로 옆 초지 위에는 자그마한 벌통 수십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주위로 벌통 관리인이 분주히 움직인다. 벌꿀 채밀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벌꿀은 백두 천지님이 내리신 생명수요 영약(靈藥)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 안 가득 침이 고인다. <계속>
임덕수, 경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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