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평화기념관은 제주도 다크투어 필수코스의 하나로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기념관은 사건의 발생부터 전개, 진상규명운동까지 전 과정을 누구나 알기 쉽게 전시하고 있다. 건물 외형은 4.3 사건의 역사를 담은 그릇을 상징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국내에서 평화도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2018년 이후라고 한다. 국가 차원의 평화논의는 국가권력 및 세계정세에 민감해지면서 새로운 평화를 구성하는 주체로 평화도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평화도시는 유네스코가 선정하거나 지방자치단체 스스로 표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국내 사례만 살펴본다.
백일순은 국내 신문기사 분석을 통해 도시 스케일에서의 평화도시 논의 변화를 연구한다. 그에 의하면 국내 평화도시 논의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2002년 이전까지 민간단체의 비공식적 평화도시이다. 주로 미군기지 이슈와 연결된 민간단체 중심의 구호적 성격의 ‘평화도시’였다. 2기는 2003년에서 2017년 사이 광주, 제주 등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지방정부 차원에서 제안된 평화도시 논의이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제주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 평화도시는 “4 · 3의 화해와 상생 정신 아래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정의가 실현되고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확장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같은 목표는 4 · 3이라는 역사적 사실, 2000년 남북 장관급 회담의 장소로 사용된 지정학적 특성에 기반하여 ‘제주 평화의 섬’이라는 비전을 설정하면서 가능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주민 주도나 동의의 과정에 대한 고민없이 국가정책의 지역화 사례라는 한계를 갖게 되었다. 일종의 ‘위로부터의 평화’인 것이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국토계획 속에 평화도시가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접경지역 평화벨트 조성과 남북한 경제협력 인프라 조성의 목표에서 실질적 남북협력의 가능성 있는 범주로 ‘국가’보다 ‘도시’를 고려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3기는 민선 7기 이후 지방정부의 평화도시이다. 중앙-지방정부의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 정부 정책, 2018 판문점 선언 이후 한반도 평화조성의 기대감 상승에 따라 지자체 단위에서의 평화도시 전략이 증가하였다. 하지만 2기 평화도시 논의가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에서 출발했다면 이 시기 평화도시 전략은 평화관광, 평화축제, 평화산업같은 경제적 효과의 측면에서 접근했다는 점이 특징이자 한계이다.
‘세계평화의 섬 2.0’ 구상 제주도
지자체 차원의 평화도시 사례는 제주, 인천, 부산 같은 광역단위나 포천, 평창, 김포 같은 접경지역이다. 이중 20년 넘게 평화도시의 관점에서 추진하고 있는 지자체 사례를 살펴본다.
제주도가 표방하는 ‘세계 평화의 섬’ 모형은 국제교류 협력과 평화지대화이다. 국제교류 협력의 모형은 제주를 스위스 제네바와 같은 세계 평화의 담론 및 실천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이다. 국제회의 유치, 평화사상 연구의 거점 등 평화적 수단에 의해 세계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이상을 설정했다. 이러한 전략은 대외적으로 도시비전을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지만 지역사회 내부의 평화실천 전략이 미흡하다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범도민 실천운동’ 같은 캠페인성 민간기구를 설립했지만 민관의 상호협력 체계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제주도는 평화사업의 재도약 기반 마련을 위해 ‘세계평화의 섬 평화실천 사업 2.0’ 구상을 발표했다. 글로벌 평화협력, 남북교류협력, 4 · 3평화, 평화산업, 평화문화확산 등 5대 분야 총 23개 사업이다. 주요 내용은 제주포럼 위상 강화, 제주형 평화교육 개발, 증강현실 평화관광 프로그램 개발 등이다. 지난 5월 개최한 제주포럼에서는 ‘평화의 섬’ 제정 20주년을 맞아 제주포럼을 정부의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대한민국 대표 공공외교 플랫폼으로 키워내고 다자간 지방정부 협력의 장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제주형 평화교육의 경우 4.3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교훈을 평화와 인권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학교 교육의 현장에서 활용하여 평화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23일부터 사흘간 ‘제주 4·3-인천 5·3 민주항쟁’ 역사·평화교육 학생 교류를 운영하며 지자체 간 연계교육도 펼쳤다. 제주도는 국가 단위의 평화논의를 지역화하였으나 행정 중심의 구조를 가지면서 한계를 보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2.0 구상을 통해 평화관광, 평화교육으로 확산시키며 평화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하는 애플의 온라인 드라마 ‘파친코’는 피란수도 부산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성군의 장소 기반 평화이야기 발굴 작업은 다양한 문화예술콘텐츠로 확장될 수 있다.
전쟁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부산
부산은 2015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역의 전쟁유산을 평화의 가치로 전환하여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원래 부산이 6.25전쟁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식은 ‘임시수도’였다. 부산이 전쟁 기간 행정의 중심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서울 중심적 사고와 일회성이라는 한계를 가진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 결과 전쟁 시기 정부기능의 유지를 강조하는 것에서 휴전 후 피란민들이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을 이룬 도시를 강조하게 되었다. 도시의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역사문화적 가치의 해석 차이이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17년 최종 9개소의 유산을 ‘조건부’ 잠정목록으로 등재했고 지난해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 주요 장소는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유엔묘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 이들 장소는 행정과 민간, 산업의 변천사를 품고 있는 장소로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품고 있음을 제시한다. 부산은 평화가치를 보여주는 장소자산을 찾아내어 장소성을 드러내고, 글로벌 기준에 맞추기 위한 세계유산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와함께 ‘문화재 야행’, ‘도시재생’ 같은 사업이 병행되는 것은 물론 부산유엔위크 같은 행사를 통해 도시브랜딩 이미지로 연결하는 노력도 하고 있다. 부산유엔위크는 매년 10월 24일 유엔의 날부터 11월 11일까지 개최하는 행사로 ‘세계평화 중심도시 부산’을 모토로 글로벌문화콘텐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부산시가 피란수도 부산의 유형자산과 함께 무형자산의 가치를 알리고 시민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란민들에게 방을 내어주기 위한 이야기, 세계 최초의 유엔묘지, 묘지를 삶터로 바꾼 아미동 비석마을의 사례는 부산의 포용력과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주와 부산의 사례에서 고성형 문화도시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역사적 사실과 지정학적 위치에서 평화의 가치를 해석하고 글로벌 모범으로 도달하기 위한 목표를 갖추며 행정과 민관이 단계적으로 추진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일제강점기 수탈과 수산업, 실향민, 납북어부 등 고성 고유의 이야기에서 고성의 문화정체성을 발견하고 문화예술 콘텐츠 발굴과 개발 노력도 할 수 있다.
김인섭 전문기자
<참고자료>
「평화의 지역적 전환_국내 평화도시 논의를 중심으로」, 백일순, 대한지리학회지 제57권 제1호 2022
「평화문화도시 부산 추진방안연구」, 부산연구원, 2022
<‘갯배’의 장소성을 활용한 평화문화 구축방안-갯배예술제를 중심으로>, 정은희, 강원대학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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