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9일, 나는 오랜만에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을 찾았다. 생애 아홉 번째 백두 천지 등반을 위해서다.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에는 별빛이 영롱하고 휙휙 스쳐 가는 서늘한 바람결에 옷깃을 여민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수상시장(水上市場)을 찾았다. 새벽 4시밖에 안 됐는데 시장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리저리 인파를 헤치면서 산에 오르는데 필요한 먹거리 몇 가지를 산 뒤 택시에 올라 옛 기차역인 노화거참(老火車站)을 찾았다. 역 광장 여기저기 여행용 장거리 버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무리무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버스에 오른다. 그 틈에 나도 예약한 버스를 찾아 오르니 벌써 버스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보아하니 큰 단체 손님은 없고 2~3명씩, 5~6명씩 작은 무리뿐이다.
버스가 연길 시내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 20분이 더 걸렸다. 쭉 뻗은 도로변으로 띄엄띄엄 주택들과 크고 작은 건물들이 보이자 버스는 크게 좌회전하면서 용정(龍井) 쪽으로 방향을 틀며 속도를 낸다. 탁 터진 들판과 산 능선 계곡이 까마득하게 저 멀리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사방천지에 연초록 푸르름 일색이고 군데군데 잘 가꾸어진 푸른 숲과 전답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창으로 내려다보니 낮은 지대에는 수도작(水稻作)으로 가꾼 논에 벼 포기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높은 구릉과 들판은 온통 파릇파릇 자라나는 옥수수밭이다. 푸른 옥수수 들판 사이로 옹기종기 많게는 20~30채, 작게는 10여 채 붉은 지붕을 올린 농가들이 흡사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어곡(御穀) 생산하던 70리 화룡 들판
숨소리가 커지면서 마음속에서는 어느새 야릇한 평화와 희열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아! 저곳이 바로 선경이고 낙원이구나!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눈을 뜨자 어느새 버스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길 왼쪽으로 낮은 구릉을 따라 논들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뻗어 나간다. 70리에 달한다는 화룡 들판이다. 그 옛날 황제에게 진상하던 어곡(御穀)을 생산하던 바로 그 들판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溥儀)가 화룡 들판에서 나는 어곡을 특히 좋아했단다.
끝없이 이어진 들판이 아물아물 저 멀리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가까운 곳 쭉 뻗은 능선 골짜기에는 2~3채의 농가 주택이 보이고 주변에서는 한 무리의 흰 양 떼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작은 산 능선과 들판들은 서서히 그 형상과 모양새가 제법 크고 높은 산등성이와 산협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상념에 잠겨본다. 저 드넓은 들판들과 산 능선 그리고 계곡을 가득 메운 푸른 옥수수밭은 누가 씨앗을 뿌리고 생육했으며 또 어떻게 수확할 것인가? 농자유토, 경자유전(農者有土, 耕者有田)이니 농민들이 어련히 땀과 노력으로 잘 길러낼 테지만 그래도 왠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오는 길에 봤던 농가주택이래야 많아야 수백 채에 불과했고 한 집에 넉넉히 잡아 3~4명이라고 쳐도 기껏해야 2~3천 명 정도일 것이다. 농촌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농사일에 손을 떼지 않아온 나로서는 그 정도 일손으로 이런 망망대해 같은 들판을 경작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모든 작업이 기계화로 전환되고 첨단기술을 총동원한 자동화시스템으로 관리 경작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의 농업 현대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 무렵, 저 멀리 큰 표지판이 보인다.
화룡(和龍) 두 글자다. 표지판을 뒤로하고 10여 분을 더 달리자 지금껏 보아온 들판 산 능선과 구릉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높고 험한 푸른 숲이 전후좌우로 도열하기 시작한다. 산록산협으로 둘러싸인 긴 구릉을 지나 버스가 막다른 구릉으로 진입한다. 바로 앞에 수도(隧道), 우리말로 터널이다. 어둠 속으로 버스는 빨려 들어가고 곧이어 또다시 긴 터널로 이어진다. 3~4분을 달리자 터널은 끝나고 다시 좌우로 비좁은 긴 구릉이 뻗어 나간다. 고개를 들어 산 위를 올려다보니 급경사의 푸른 산록들만 유유히 흘러간다. 햇빛에 반사된 푸른 나뭇잎들이 번들거리며 미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여유롭고 풍요로워 보인다. 속도를 줄인 버스가 길가 2층 휴게소 앞에서 정차하자 승객들이 우르르 내린다.
신선들 휴식 취할 만큼 신비한 선봉령
뒤따라 내려 보니 이곳이 바로 선봉령(仙峰岭) 휴게소다. 연길을 출발한 지 어느새 1시간50분이 흘렀다. 휴게소에는 화장실과 여행객들을 위한 약간의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선봉령 정상에서 불어 내린 서늘하고 시원한 높새바람이 주변 나무들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두 손 높이 쳐들고 긴 호흡을 하니 가슴이 크게 열리고 머리는 맑고 청량해진다. 이름처럼 신선들이 내려와 휴식을 취할 만큼 생기 넘치고 서기가 감도는 신비한 곳이다. 저 울창한 숲속에는 물 버들나무, 참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등 온갖 수목들과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공생경연하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겠지.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원시 자연 속에서 나도 신선처럼 자유롭게 영생하고 싶다. 그러나 속세의 욕망을 떨치지 못한 채 신도(神道)를 깨우치지 못한 내가 어찌 신선의 세계를 탐할 수 있으리오. 돌이켜보니 80여 성상을 살아오면서 내가 저지른 죄업과 쌓아 놓은 업보가 수미산보다도 높아 보였다. 무지와 욕망이여! 부끄럽고 안타깝고 서글프구나! 지나온 삶을 조용히 반추해보며 잠시나마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계속>
임덕수, 경동대학교 명예교수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