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혜학원터 앞. 함석헌 기념사업회는 함석헌이 활동했던 지역에 험석헌 순례길을 만들기 위해 고성군을 방문했다. 선유실리와 탑동저수지, 선혜학원터, 관대바위 일대가 험석헌이 씨알사상을 키웠던 길이다.
“그 형님이 얼마 전 돌아가셨잖아. 너무 억울했지. 그때는.”
강원영상위원회가 고성군민을 대상으로 2023년 로케이션 인센티브 지원작 <하이재킹> 시사회를 개최했을 때 들려오던 말이다. 일찌감치 영화관에 들린 두 명의 남성에게 <하이재킹>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1971년 벌어진 실화의 삶터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들의 이웃에게는 현재 진행형 고통이었다.
접경지 고성군의 지리적 특징은 6.25 전쟁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비평화의 상태를 만들었다. 영화 <하이재킹>의 배경이 된 사건도 그렇다. 하필 납치범이 고성군 거진읍 거주자였다. 맏형이 6.25때 월북하여 북한군이 된 정황 등도 있었다. 당연히 고정간첩을 의심했고 이웃의 고통이 동반된 것은 물론이다. 두 남성의 대화 속 ‘그 형님’도 그때 고통을 받았다.
대한민국 동쪽의 최북단 고성군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는 ‘별과 달, 우주, 설악의 시인’으로 알려진 고 이성선 시인의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의 후배이자 현재 <이성선 시인 기념사업회> 회장 이선국 작가는 시인의 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성장과정과 지정학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인이 소학교 시절 6.25전쟁을 맞았고 38 이북지역에 위치한 고성군은 북한체제였기에 시인의 아버지는 그 체제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후 시인에게는 ‘월북 아버지’라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고 분단된 나라의 접경지역 주민에게 ‘반공정신’은 더욱 투철해야 했다. 접경지 고성 주민의 운명은 분단 비극의 이데올로기가 짓누를 수밖에 없었고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선국 작가는 “시인은 의식적으로 서경적인 사유를 경계하고 서정적인 사유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학처럼 고고하고 청초한 삶으로 일관했던 시인의 시 세계는 6.25전쟁이라는 불행한 역사와 접경지의 장소성이 겹치면서 “자연주의적 순수 서정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고집스럽게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서정이 시 세계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순수 서정은 현실에서 환경생태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졌고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하게 만든 동인이기도 했다. 분단으로 상처 입은 시인의 치열한 내면이 현실에서는 생태운동으로 나아갔고 그 정신은 설악산과 석호, 동해바다를 품은 지역의 환경을 보듬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쪽 아버지의 그리움, 남쪽 반공의 현실, 고성 자연의 생태계가 그의 시세계와 환경운동을 이어주며 고성평화(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성의 인문가치에서 평화 이야기 발견
고성의 역사문화와 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인물을 쫓다 보면 자연스럽게 ‘평화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 <하이재킹>의 배경이 된 고성 주민의 이야기는 납북귀환어부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1955년에서 1992년 동해안과 서해안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뒤 돌아온 어선이 500척이다. 고성군은 지난 2022년 납북귀환 어부들의 명예회복과 피해 사실 진실규명을 위해 찾아가는 접수창구를 운영했다. 납북되었다가 귀환했지만 반공법, 수산업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은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고성군에 거주하는 사진작가 장공순은 일찌감치 이런 이야기를 사진으로 작업했다. 지난 2017년 그는 <저도어장 _ 동해안 최북단 어장, 그리고 납북어부 이야기> 사진전을 통해 저도어장 어업활동과 납북 어부들이나 남은 가족의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이 사진전에서 일터였던 저도어장의 생생한 모습과 함께 삶터에서 뜯겨나간 ‘전쟁의 후유증’을 흑백으로 보여주었다. “남편 또는 아버지, 형, 동생을 앗아간 비극의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생계의 절박함과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선에 올라 거친 파도와 잠수 한계를 극복해가는 최북단 어부들의 애환과, 그 불굴의 정신이 읽혀지기를 기대한다”는 장공순 사진가의 시선은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고성이 아니다. 주목받지 못한 실향민과 동해북부선, 저도어장의 삶이다. 작가의 시선이 닿은 ‘소재’는 전쟁의 비극(실향민), 평화의 열망(동해북부선), 냉전의 현실(저도어장)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자체가 평화활동이기도 하다.
장공순 사진집 <저도어장>. 장공순 작가는 1999년부터 동해안 최북단 ’저도 어장‘에 관심을 갖고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집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안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동해안 최북단 어업인의 삶이 소개된다.
고성 역사문화 특징 품고 있는 인물들
지난 2022년 함석헌기념사업회가 고성군을 방문했다. 선유실리와 탑동저수지, 선혜학원터를 답사하고 함석헌 순례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이자 평화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평화주의 사상은 무력배제의 원칙과 민중론이다. 무력배제 평화주의는 현실정치에서 불온한 것이 되거나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무력한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의 평화주의는 그 주체와 목적이 ‘민중’임을 밝힘으로써 사회 구조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힘을 얻게 된다.
이러한 함석헌 사상의 기초가 고성에서 시작되었음을 <함석헌 평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한일합방 이후 학생들이 데모한 후 탄압받는 현실을 개탄하며 ‘산민중’이 그리워 진부령 골짜기에 있는 ‘안반덕 씨알개척농장’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의 장래’를 읽었고, 이듬해 2월 서울로 돌아가서 함석헌 사상이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은 일년에 두어번 고성에 오고 안반덕 씨알농장과 대진항 향우야학원에 들리기도 했다.
이성선과 납북어부, 함석헌 모두 고성의 역사문화적 특징을 품고 있는 인물들이다. 지역의 인문정신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에서 탄생한다. 고성의 인문정신은 평화의 가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인문평화를 지역의 가치로 만들기 위한 문화활동은 지역 고유의 서사를 만들면서 문화경쟁력이 될 수 있다. 이성선 시인의 서정과 생태평화가 고성의 평화정신이 되게 만드는 일, 납북어부의 아픔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환기하기 위한 문화기획, 함석헌의 평화정신이 오늘까지 유효함을 확인하며 평화아카데미를 개최하는 일 모두 고성형 평화활동의 일환이 될 수 있다. 평화문화도시 고성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김인섭, 전문기자
<참고자료>
『함석헌 평전』, 김성수, 삼인출판사, 2001 「이성선 시인 토론자료」, 이선국, 2021『저도어장』, 장공순, 눈빛출판사, 2017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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