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꺾어져 가는 3월의 발밑에서 4월이 고개를 내미는 오늘, 질척거리는 봄눈이 내리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는데, 봄을 느낄 수 없는 지금의 시절을 가장 잘 나타낸 표현이다. 경칩과 춘분을 지났는데도 날씨는 겨울과 봄이 밀고 당기는 샅바싸움을 하는 듯, 따듯함과 눈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계절 또한 어수선하다.
그래도 봄은 기어코 온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봄은 온다.’
필자가 느끼는 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피는 계절의 이름인 봄이다. 다른 하나는 심리적 따뜻함을 뜻하는 마음으로 느껴지는 봄이다.
계절로서의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좀 더디게 오더라도 어쨌든 우리 곁으로 온다. 그리하여 개나리 꽃망울을 노랗게 터트리고, 하얀 목련꽃송이로 어둔 밤하늘에 알전구를 달아 준다. 마침내 벚꽃 팝콘을 터트리고, 꽃비로 우리 곁을 떠난다.
그런데 마음의 봄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 같지도 않다.’
공직생활 40년, 소위 발에 땀 나도록 뛰었어도 남은 건 20년 넘게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매달 25일에 통장에 숫자로 찍히는 연금이 전부인 필자는 요즘 세상이 불안하다. 마트에서 무심코 들어본 두 개 짜리 오이 봉지가 오천 원에 가까운 숫자로 가슴을 놀라게 하고, 후식으로 즐겨 먹던 사과가 식탁 간식 바구니에 오르지 못한 지 꽤 오래됐다.
‘오늘은 ‘0 마트’에서 목살을 세일 한데’라고 웃는 얼굴로 요일을 적어가며 마트에서 마트로 오픈런(open run)을 하는 집사람을 보며 슬그머니 죄의식이 드는 건 무얼까?
‘연금 백수’라 칭하는 필자가 그러할진대, 고정 수입이 없는 어려운 이웃들은 요즘 세상살기가 얼마나 팍팍할까에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참 답답하다.
구름 위에 사시는 높으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국민’, 또는 ‘서민’들은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세끼 밥 편하게 먹고, 편안하게 쉴 집 한 칸, 각자의 취향에 따라 이따금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 위에 계신 분들은 그걸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 그렇게 해서는 내 편을 못 만드니까….
그러니 방송에 나와서도, 유세장에서도 ‘좌파, 우파, 대파’ 타령만 한다.
필자가 이야기하는 마음의 봄은 다른 어휘로 바꾸면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다. 그런데 그 희망이 무언지 모르는 이들이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에 빠져, 한 눈 팔고, 싸움 한 판 하느라’ ‘바람이 달려가서 다급한 사연’ 전해도 싸움판에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디게 더디게 올’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아 참 답~답 하다.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언제 올거니?
김종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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