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가게 천일안경원 김상기 대표.
“제가 검정 교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돈이 없어 진학을 하지 못했어요. 오징어 낚시공장에서 일을 하며 점심때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로 놀러 갔어요. 점심시간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은 5교시 수업을 하러 들어가고, 나는 울면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어요.”
가난한 어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상기(68세) 천일안경원 대표는 입학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낚시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고3 나이에 강릉 사는 이모가 운영하는 사진관에 사진기술을 배우러 갔다. 강릉여고 졸업사진을 찍으러 경포대로 나갔는데, 까만 교복에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앵글이 흐려져 사진을 찍지 못하기도 했다. 군 생활 중에도 힘들어 극단적인 생각까지 품었지만, 하늘의 달을 보고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렸다. 그럴 힘이 있다면 남을 위해 일하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가난한 결혼식, 국수 대접할 돈도 없어
어렵게 군 복무를 마친 김상기 대표는 1979년 고향 속초로 돌아와 친척이 경영하는 ‘천일안경’에 취직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성실하고 사회성도 좋다고 월급을 더 많이 줄테니 오라는 곳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눈이라도 오면 새벽 6시에 출근해 가게와 인근 가게 앞까지도 깨끗하게 눈을 쳤다. 쌓인 눈으로 혹시라도 가게 앞에서 손님이 미끄러지면 다시는 가게를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4년 동안 안경원 직원으로 지내다가, 1983년 9월 어렵게 빚을 내 안경원을 인수했다. 그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인근 사람들이 빚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1981년 김상기 대표는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여동생하고 같은 날 결혼식을 올렸는데, 여동생은 오전 11시에 서울예식장에서 식을 올리고, 김상기 부부는 오후 1시 중앙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손님들 접대할 국수값도 없었고, 신혼여행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교회에서 아내와 함께 철야기도를 올렸다. 신혼집을 따로 마련하지 못해, 청학동 40계단 아래 아내가 하던 부산미용실에 딸린 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에는 금은방에서 안경을 팔 정도로 주먹구구식으로 안경 제작이 이뤄지던 때였다. 안경원 직원으로 입사한 김상기씨는 ‘우리가 남들의 눈을 밝게 해주는 건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라는 신념과 각오로 안경 공부에 매달렸다. 1979년경부터 국내 홍채학의 기틀을 마련한 이남한 교수와 지금 서울에 있는 박신호라는 친구와 셋이서 서울에 모여 안경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1979년만 해도 서울까지 가는데 5시간 이상 걸렸다. 안경 공부를 하러 힘들게 서울까지 수시로 쫓아 올라갔다.
김상기 대표는 난시에 대한 개념조차 이해가 부족한 시절에 사축난시, 진난시, 도난시 등 전문적인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면서 안경에 대한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쌓았다. 이러한 학습을 바탕으로 1983년 안경원을 인수해 직접 경영하게 되었다.
천일안경원 김상기 대표가 만든 ‘10대들의 쪽지’ 홍보 스티커. 1980년대 청소년들이 해당 번호로 전화를 걸면, 고민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들을 3분 간 들을 수 있어 ‘전화쪽지’라 불렀다.
당시 안경사 자격증 제도가 없었다. 1990년경 안경사 고시제도가 생기자 김상기씨는 바로 응시해 합격했다. 이후 대학에서도 안경공학과가 생겨 전문적인 안경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인 공부는 안경원 인수 후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밀한 시력 검사 등으로 ‘그 집에서 안경을 하면 눈이 안 아프다’고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이 안경을 하러 천일안경을 찾아주었다. 손님이 많을 때는 15명의 직원을 두고 운영할 정도였다.
창업 당시에는 플라스틱 안경 렌즈가 없던 시절이라 모든 안경은 유리알로 제작했다. 얼마나 손님이 많은지, 안경 렌즈를 손으로 갈다 보면 손가락 여기저기가 마모될 정도였다. 지금은 자동 기계로 유리를 다듬지만, 수동으로 유리알을 작두로 깨면서 모양을 만들어 가는데, 유리 가루가 눈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바빠서 그냥 방치했다가 밤 10시30분 안경점 문을 닫고서야 흐르는 수돗물에 눈을 깜빡이며 빼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미처 못 만든 안경 50개를 진열장 위에 놔두고 퇴근할 때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강릉이나 서울까지 가서 안경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속초에서도 정확한 시력검사가 이뤄지게 되면서 안경을 하러 외지에 나가지 않게 되었지요. 고객 사후관리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1983년 개업 때부터 모든 고객에게 생일에 맞추어 안경닦이와 1만원 상품권을 동봉해 생일축하 카드를 보내고 있어요.”
김상기 대표는 고객 서비스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고객과의 대화법은 물론, 마인트컨트롤, 마케팅 공부도 열심히 했다. 전화 한 통화도 강약을 주어 정중히 받았다. 지금 천일안경원 매장에서 김 대표의 자리는 가게 문 앞이다. 손님이 들어서면 바로 일어서서 환대한다. ‘웃을 마음이 없다면, 아침에 가게 문을 열지 말라’는 이스라엘 속담을 늘 되뇐다.
안경점 화장실을 개방화장실로 오픈하고 화장실 내에는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무료 생리대 자판기를 설치했다. 무료 핸드폰 충전기를 설치해 손님이 아니어도 누구나 사용하도록 했다. 지역 특성상 인근지역에 군인들이 많은데, 외출 나온 장병들이 쉬어가고, 일을 보는 동안 짐을 보관해 주기도 한다.
봉사단체 늘사랑회 대표로 활동
고등학교 진학의 길이 막혀 좌절한 김상기 대표는 뒤늦게 만학의 꿈을 이뤘다. 1987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설치고 다닌다는 모진 말을 들은 김 대표는 1988년 대입검정고시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그리고 동우대학교 행정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해 졸업하고, 경희대 행정대학원까지 수료했다.
청소년기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김상기 대표는 평생을 청소년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천일안경원 대표보다는 봉사단체 (사)한국늘사랑회 이사장으로 더 유명하다.
강원도 자원봉사 명장…“자수성가 늘 감사”
김상기 대표는 17세 때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진학에 실패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아껴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들을 후원했다. 1972년부터 연탄 배달, 도시락 배달, 일일찻집 등으로 자원봉사를 시작해, 에델바이스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자원봉사 활동을 해왔다. 1983년 안경원 창업 무렵에는 봉사단체 ‘늘사랑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나섰다. ‘늘사랑회’는 ‘우리들 가슴속엔 늘 사랑이 있다’라는 뜻으로 지었다. 전 속초시청 김영숙 과장 등과 함께 김장김치 나누기, 군부대에서 소년소녀가장 캠프 활동, ‘십대들의쪽지’ 청소년 심리지원활동, 심장병 환자 수술 지원,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본업을 제쳐 두고 적극 나섰다.
1985년 <강원일보>에 강릉에서 어느 여학생이 안경을 못 맞춰서 자살을 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를 접하고는 김상기 대표는 지역 학교를 찾아다니며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력 검사를 해주고 안경을 무료로 제작해 줬다.
1992년 4월 19일자 <한겨레신문> 12면에 “함께 사는 삶, 속초 늘사랑회 김상기씨” 가 게재되었다. 기사에서는 “고성 아야진 정아무개 여학생이 신장병을 앓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나, 속초 늘사랑회 주선으로 서울 중앙병원에서 신장이식수술을 받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며, “늘사랑회 주선으로 신장병, 심장병 수술을 받은 학생이 12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늘사랑회는 20여 가구의 소년소녀가장을 후원하고, 10년째 어려운 중·고등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며, “청소년 상담 역할을 하는 ‘전화쪽지’도 운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금도 김상기 대표는 학교폭력조정위원, 군부대 강의, 재단법인 늘사랑장학문화재단 등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느라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2011년부터 자원봉사센터에 등록한 봉사시간이 9년 만에 1만3,125시간을 달성해, 지난 2021년 4월 강원도 자원봉사 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상기 대표는 “함경남도 홍원군 출신 실향민으로 고향에 가고 싶어하시던 가난한 어부의 자식으로 이만큼 자수성가한 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술과 담배, 골프를 하지 않을 만큼 스스로 근검하고 절제된 생활을 신조로 삼고 있다. 김상기 대표는 자신의 봉사활동과 안경원 경영을 결부시키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천일안경원은 1001(천일)이라는 숫자 표기로 안경알 2개와 안경다리 2개로 안경 모양을 표현한 상호이다. 김상기 대표는 “옷은 안 맞아도 대충 입을 수 있지만, 안경은 초점이 조금만 안 맞아도 착용이 어렵다”고 말한다. 안경원은 전문기술이 중요한 만큼, 지금도 오랜 경력의 직원들을 스카웃해서 함께 일하고 있다. 한번 착용해서 만족한 고객들은 속초뿐만아니라, 홍천, 삼척 등 타 시군에서도 일부러 천일안경원을 찾고 있다.
천일안경원은 지난 2020년 강원도 안경업계 최초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인증하는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단지 40년 역사의 가게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평생을 사회봉사에 매진해온 김상기 대표의 철학과 경영마인드도 크게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김상기 대표는 안경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 대표의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학동에서 ‘오렌지안경원’을 운영 중이다. 자신에게는 오로지 첫째도 봉사, 둘째도 봉사라고 강조하는 김상기 대표는 지금도 봉사 활동 이외에는 안경원을 떠나지 않는다. 김상기 대표의 ‘성실하게 일하고 함께 나눈다’는 경영철학이야말로, 백년가게 천일안경원을 이끌어 온 큰 힘일 것이다.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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