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함흥냉면옥 창업주 고 이섭봉씨가 자전거를 타고 냉면을 배달하는 모습.
함흥냉면옥 건물 앞에 세워진 배달오토바이.
원래 냉면은 배달음식이었다. 동네 부둣가나 조선소에서도 더운 여름날이면 냉면 7, 8 그릇을 점심으로 작업장으로 시켜 먹었다. 주문전화를 받고 면이 불지 않게 얼마나 빨리 많은 양을 배달하느냐에 따라 냉면집 인기와 매상이 달라졌다.
함흥냉면옥 창업주 고 이섭봉씨는 요즘 우스개말로 잘 나가는 ‘배달의 기수’였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한국전쟁 전 함흥에서 사이클 선수를 했던 이섭봉씨는 자전거로 한 번에 냉면 40그릇을 배달하기도 했다. 그때는 배달통도 없었다. 널찍한 합판 위에 냉면 10여 그릇씩 3단으로 쌓고, 그 위에 육수 주전자와 양념통을 얹었다. 꾸러미를 보자기에 싸서는 어깨와 왼손으로 받쳐들고, 오른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냉면 배달을 갔다. 함흥냉면옥 식당 벽면에는 1960년대 냉면 그릇을 들고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는 이섭봉씨의 사진이 걸려 있다.
- 사장이 직접 냉면 배달 다녀요
지금도 함흥냉면옥은 배달의 전통을 이어 전화 주문을 받고 직접 냉면을 배달한다. 주방일에 바쁜 이문규(54) 대표도 짬을 내어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배달을 나가기도 한다. 함흥냉면옥이 주문 배달을 고집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1992년 경 이문규 대표가 맡았을 때, 장사가 안되어 직원들 인건비조차 감당이 안 되었다. 그때는 냉면 한 그릇 주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대표는 지금 장사가 좀 나아졌다고 해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기에 배달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한다. 식당에 손님이 몰려 정신없이 바쁠 때는 미처 주문 전화를 받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면 휴대폰 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아시는 어르신들이 이 대표한테 직접 주문 전화를 걸어온다.
“문규야! 지금 냉면 한 그릇만 갖다주면 안 되겠니?”
“어머니. 죄송해요. 오늘은 다른 음식 시켜드시면 안될까요? 지금 너무 바빠서 배달을 갈 수가 없어요.”
“내가 냉면이 꼭 먹고 싶어서 그러지. 기다릴 테니, 꼭 좀 갖다줘.”
“네. 알았어요. 그럼 좀 기다려 주세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1년에 수복된 속초에서 개업한 함흥냉면옥은 남한 땅에서는 가장 오래된 함흥냉면집이다. 함흥이 고향인 이섭봉씨는 1.4후퇴 때 혼자 피난을 내려와 속초에서 매형을 만나 함께 냉면집을 차렸다. 속초시내 신한은행 건너편에 있는 원산시민회관 자리가 처음 함흥냉면옥이 장사를 시작한 곳이다. 이섭봉씨는 야산을 깎고 움막을 치고 식탁과 의자 몇 개를 놓고 냉면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형이 냉면집 주방일을 맡았다. 그때도 상호는 함흥냉면옥이었다. 움막에서 시작해 장사가 제법 잘 되어 번듯한 건물까지 올렸다. 그리고 지금의 속초우체국 자리에 회관식으로 2층 건물을 지어 냉면집을 이전했다. 명태, 오징어가 많이 잡히고 속초 경기가 좋을 때라 장사가 잘되었다. 하지만 사기를 당해 식당 건물까지 재산을 몽땅 잃어, 다른 곳으로 식당을 옮겨 장사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이섭봉씨는 속초 체육 육성에 헌신적인 공헌을 한 체육인이다. 냉면집에서 번 돈을 모두 사이클 선수 육성을 비롯해 지역 체육 진흥에 쏟아부었다. 실향민 출신 고 이반 작가는 1960년 고등학생 시절에 역전마라톤 경기에 출전하기 전 두 달 동안 함흥냉면옥에서 이섭봉 사장의 배려로 하루 한 끼식 육개장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고 회고했다. 이섭봉씨는 사이클 선수 지도 육성의 공을 인정받아 1963년 12월 제5회 강원문화상을 수상했다. 1971년에는 설악산 입구~속초간 도로 준공을 경축해 속초에서 전국 사이클 대회를 개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이클 말고도 태권도와 육상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1960년대에는 속초시태권도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1982년에 창단된 속초 동방원양 사이클 실업팀의 감독을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으며, 1991년 속초시청 사이클 실업팀이 창단되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 선수가 체육지도자인 이섭봉씨의 권유와 조언으로 사이클 선수에서 마라토너로 전향해 성공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 명태회 고명 처음 개발한 함흥냉면옥
1992년 이문규 대표가 군에서 제대할 무렵 부친 이섭봉씨가 작고했다.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주방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주방에 들어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25살 나이에 그렇게 시작한 냉면집 주방일을 이 대표는 30여년 동안 계속 하고 있다.
부친 작고 후에 어머니가 냉면집을 경영하고 이 대표는 주방일을 맡았다. 냉면 만드는 기술은 부친이 가르친 주방장 형들한테 어깨너머로 배웠다. 아내와 함께 식당에서 열심히 일을 했지만 생활이 계속 쪼들렸다. 그래서 2006년에 속초를 떠나 경기도 일산과 주문진에서 3년 간 냉면집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2009년에 다시 속초로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함흥냉면옥 경영을 넘겨받았다.
다시 돌아와 보니 냉면집 경영이 말이 아니었다. 예전 속초 함흥냉면의 원조라는 명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루에 냉면 50그릇도 팔지 못했다. 이거 큰 일 났다 싶었다. 눈에 불을 켜고 아내와 둘이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게 구석구석을 모두 닦아내고 새로 단장했다. 양쪽 주머니에 꼭 스티커를 넣고 다녔다. 아침에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어디 배달을 가면 그 집 양 옆으로 두 집씩 스티커를 나눠줬다.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도 열심히 했다.
주방 안에서만 10여년간 있다가 외지로 몇 년 돌다 왔더니, 속초에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주변 어르신들이 “쟈가 저 이섭봉씨 아들이래”, “이섭봉 아들이 와서 장사를 한대”라며 알아봐 주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동창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냉면집을 맡으면서 동문회 및 각종 모임도 19개나 쫓아다녔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나니, 장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왔다.
1950년대 함흥냉면옥 초창기에는 냉면 육수나 고명을 쇠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로 만들었다. 돼지뼈 사골 국물로 육수를 만들고, 면 위에 돼지고기와 야채를 얹었다. 양양의 방앗간에서 감자가루를 구해와서 면을 만들었다. 둥그런 채에 감자가루를 한 바가지씩 부어서 곱게 분말을 냈다. 1970년대 들어 고구마가루로 면을 냈다. 고구마 가루가 안 좋으면, 감자가루를 구해다 섞어서 쓰기도 했다. 채에다 친 가루를 땀을 흘리며 뜨거운 물을 부어 힘들여 손반죽을 했다.
예전에는 냉면집 주방에 쇠로 만든 수동식 냉면틀이 있었다. 국수틀에 반죽을 집어넣고 압력을 가해 누르면 면이 뽑아져 나왔다. 면을 제대로 잘 뽑으려면 3m나 되는 긴 쇠봉을 당겨 반죽을 눌러야 했다. 보통 어른 2명이 이 쇠봉에 매달려 있는 힘을 다해 쇠봉을 당기고 눌렀다. 이문규 대표도 어렸을 때 이 냉면틀 쇠봉에 자주 매달렸던 기억이 있다. 반죽이 잘못되면 면이 잘 안 나온다. 그러면 다시 반죽을 파내고 새로 반죽을 해서 넣어야 했다. 잘못하면 주방 형들이 부친 이섭봉씨한테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힘이 많이 들어가는 냉면집 주방일은 힘 좋은 남자들의 일이었다. 1980년 들어서면서 유압식 냉면틀이 나와 크게 힘을 쓰지 않고도 면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 함흥냉면에 올라오는 명태회 고명은 1980년 무렵 함흥냉면옥에서 최초로 개발했다. 명태회 이전에는 주로 가자미나 쥐치를 냉면 고명으로 얹었다. 작은 가자미는 빼째 썰기도 했지만, 주로 어지간히 큰 가자미를 포를 떠서 사용했다. 이문규 대표는 어렸을 때 포를 뜨고 남은 뼈로 졸인 가자미뼈조림을 많이 먹었다. 가자미 머리에 살이 좀 붙어 있어 알뜰히 발려먹었다.
1980년대 들어 가자미 손질이 점차 어려워져 함흥냉면옥에서는 중앙시장 안에 있는 현대수산에 요청해 명태회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다른 냉면집도 따라서 명태회를 냉면에 올리기 시작해, 명태회가 함흥냉면 대표 고명으로 자라잡았다. 명태회 고명은 어머니 아이디어였다. 어머니가 가자미와 쥐치는 어획량이 적어 비싸니, 당시 동해안에서 많이 나는 명태로 고명을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주문진에서 시집을 온 어머니는 뱃사람들이 배에서 명태를 잡아 바로 회를 떠서 먹는 걸 알고 있었다. 생태로 명태회를 만들어 보니 살이 풀어져 버렸다. 그러나 언 동태를 썰어서 회를 만들어 보니 살이 풀어지지 않았다. 명태회를 식초와 양념에 버무리면 새콤달콤한 게 맛이 좋았다. 요즘 전국에서 이름이 난 속초코다리냉면은 명태회가 올라가는 속초 함흥냉면의 다른 이름이다.
속초 함흥냉면옥은 지난 2018년 속초 음식점 중에서는 최초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백년가게에 선정됐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이문규 대표는 강원지방중소벤처기업청 주관으로 2023 소상공인 백년멘토링을 통해 젊은 소상공인들에게 30여년간 점포를 운영하며 체득한 음식점 경영비법을 공유했다. 이렇게 백년가게로 자리잡는데는 이문규 대표의 애성이 큰 역할을 했다. 냉면 한 그릇의 배달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정성, 73년 간 속초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함흥냉면옥의 경영 비결이 아닐까 싶다.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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