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인 말이긴 하지만 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각자 우리 모두에게 올 한 해는 어떤 모습으로 또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는지 모르겠다.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올 한 해를 생각해보다가 문득 대학시절 존경하고 따랐던 고 김찬국 교수님이 떠올랐다.
고인은 부총장 직함까지 가지고 계셨지만 엄했던 시절, 당국의 뜻에 따르지 않았고 사회적 약자나 학생들 편에서 항상 고민하고 행동하셨던 분이셨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퇴직 후 자택에는 후학들, 지인들, 동료분들로 늘 북적였다. 시간이 한참 많이 지난 얘기지만, 언젠가 한 대학 친구가 교수님을 뵈러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수님과 함께 험난한 시절을 견뎌 오신 사모님께서 이제 더 이상 방문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방문한 이들에게 교수님이 치매에 걸리셨고 방문한 이들을 기억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들에게는 정정한 모습의 교수님만 기억하게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했다.
우리가 앓게 되는 모든 병이 다 아프고 가혹하겠지만 어쩌면 치매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가혹한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경험하고도 한 쪽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에 서로에게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을 그 순간들을 공유할 수 없는 이 질병이 남겨진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고통일지.
그렇기에 사실 치매나 기억상실은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 문학에서 소재나 극적인 장치로 등장한다. 한 해에도 무수히 많은 작품이 제작되고 발표되지만 이와 관련된 여러 작품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둘 있다. 2019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와 2000년에 상영되었던 영화 ‘오! 수정’이 그것이다.
‘눈이 부시게’는 주연 배우의 극중 마지막에 나오는 진정성 넘치고 담담한 나레이션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생 드라마였다. 치매, 기억상실, 타임 슬립, 시대물, 그리고 극적 반전의 장치를 적절히 가미하여 진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었다.
‘오! 수정’은 상영된 지 벌써 23년이나 지난 영화이다. 치매나 기억상실과는 좀 결이 다른 영화이기는 하지만 사람들마다 느끼는 기억의 편차를 여지없이 보여준 수작이었다. 이 영화에서 극중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같은 사건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불편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기억이라는 것이 각자의 상황과 욕망에 따라 얼마나 가변적인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비단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기억의 편차를 느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나 지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과거 어느 시공간을 함께 공유했던 기억이 있다하여도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이 서로 다르게 인식되고 있음을 느끼고, 흠칫 놀라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공간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공간, 그가 중점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흐름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의 흐름이 편차를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각자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윤색되어 기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새해 달력을 펴자마자 금방 12월 달력의 마지막장을 뜯거나 넘겨야 하는 시점에 다다른 것 같다. 필자에게 올 한해는 특히나 짧은 한해였다. 대상포진에 걸려 고생한 하반기는 정말 무언가 한 것도 하나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마치 반년만 산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올해 경험했던 조금은 불편했을 수도 있었던 여러 일도 의식의 흐름 속에서 또 여지없이 적절히 윤색되어 기억될 것이다. 이제 보름 정도 남은 올 한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윤색되어 우리 삶속의 기억의 파편으로 남게 될까.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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