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한 청년 예술인 김준한 씨.
지난달 29일 속초시 엑스포 광장, 하얀 두루마기와 하얀 가면, 하얀 갓을 쓴 누군가가 평화의 소녀상 옆에 앉았다. 앉은 자리 옆에는 수많은 색깔의 매직펜이 놓여 있었다. 청초호를 거닐던 시민들은 소녀상 근처로 다가와 꿈쩍 않고 앉아있는 이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몇몇은 가까이 다가와 색깔 펜 하나를 골라 그의 흰옷에 무언가 끄적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흰옷 위에는 다양한 색깔의 메시지와 그림으로 가득 찼고, 마치 새롭게 리폼한 의상 같기도 했다. 2시간 정도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가면과 갓을 벗으며 ‘올해 마지막 공연이 끝이 났다’고 웃어보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소녀상 옆에 자리를 지키며 ‘머무름’이라는 이름의 공연을 펼친 청년예술가 김준한 씨(26)를 만났다.
“‘사람들은 오가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소녀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직접 담아내고 쌓여가는 기록 속에 의미를 찾고 싶었죠.”
김준한 씨가 기획한 ‘머무름’은 배우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관객과 자연이 함께 만드는 관객 참여형 예술 공연이다. 일본을 향한 비난만 하기보다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동시에 화해와 용서의 가치 속에서 평화의 정신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 그의 뜻이었다. 또한 다양한 사람의 의견을 받으며 자신의 몸이 토론장이 되기를 원했다.
흰 두루마기에 응원 문구 가득 차
김 씨는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당시 동상 퍼포먼스를 하던 예술가들을 보고 퍼포먼스 형태의 공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떤 퍼포먼스를 할 수 있을까 1년 정도를 고민했다. 어느 날 길거리를 걷던 중 소녀상을 발견하고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잘 담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획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2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퍼포먼스는 보통의 화려한 공연과 달라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고, ‘저게 뭐야’ 하면서 지나갈 수도 있죠. 하지만 예상보다 시민들의 따뜻한 반응과 적극적인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어요.”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보니 ‘내가 하는 게 잘못된 것이면 어쩌지?’ 수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공연할 때 부모님과 함께 산책 나온 아이들이 다가와 삐뚤빼뚤 문구를 남기고 손까지 잡아주었던 순간이 김 씨에게 가장 따스하고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어르신 중 한두 분씩 공감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볼 때도 김 씨 스스로 처음 기획했던 공연의 의미를 되새기고 꾸준히 머무르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 흰 두루마기가 점점 응원의 문구로 가득 차는 걸 보면서 ‘내가 하는 게 틀린 것이 아니었구나’ 하며 또 다른 자신감을 채우는 시간이었다.
김준한 씨는 속초고등학교 재학 당시 연극부에서 활동하며 예술의 꿈을 키워나갔다. 타지에 있는 대학교의 연극영화과를 다니며 재밌는 활동과 예술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집안 사정으로 고향인 속초에 돌아와서도 한 연극단체에 들어가 평소에 접하던 연극뿐 아니라 청각으로만 공연을 하는 등 실험적인 연극을 함께 하며 다양한 아이디어와 팁을 얻었다고 한다.
5월부터 16회 공연…시민들 큰 힘 돼
지난 5월부터 11월 말까지 16회의 퍼포먼스 공연을 하면서 의상, 촬영 등 모든 것을 혼자 했다면 어려웠을 거라며 뒤에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속초문화재단의 예술인지원사업 일환으로 공연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도 기획서 검토와 포스터 촬영, 디자인 등 지역의 동료 예술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 공연에 참여해준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머무름을 완성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었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고향에 돌아왔지만 속초에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귀한 발판을 마련한 만큼 그는 앞으로 기획자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래의 젊은 연극인 중 개인 이름을 걸고 활동하고 싶어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기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속초의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잘 정착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모교에서도 선배인 김 씨는 잘 모르지만 ‘머무름’ 공연은 안다는 연극부 후배들을 보면 그는 마음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예술을 꾸준히 찾아 나가야겠다’는 목표를 마음속으로 다진다. 후배들에게 지방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화예술인들이 서울로 가려는 이유가 그곳에서 더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고 그러면서 성공의 발판 또한 대도시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잖아요. 그렇지만 지방에서도 자신만의 기반을 다지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저를 통해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채환 기자
‘머무름’ 공연에 참여해 응원의 문구를 적고 있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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