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승 화백이 ‘설악과 보광의 사계전’이 열리고 있는 보광사 지장전에서 전시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11월의 끝자락, 영랑호 한편에 숨은 절인 보광사의 ‘지장전’에 가면 조정승 화백의 바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사찰의 작은 공간을 새롭게 탈바꿈한 갤러리 ‘지장전’에서 속초의 한국화 화가 조 화백이 보광사 개산 400주년을 맞이하여 ‘바위’를 주제로 한 작품 4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작은 내설악 귀면암, 영랑호 범바위, 남설악 주전골 오색 독주암, 신선봉 수바위이다. 지난 11일 개막해 12월 30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보광산 개산 400주년 기념 조정승 초대전 ‘설악과 보광의 사계전’>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바위가 주는 교훈들이 많죠. 바위는 선조들에게 특별한 의미였어요.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했죠.”
10년 넘게 울산바위 후면 그려
조정승 화백은 설악산 풍경을 아주 좋아한다. 견문수학을 하던 시절, 전라도에서 보기 힘든 소나무를 매번 그리는 스승을 보며 의아함을 가졌던 그는 마침내 강원도 설악산에서 그 진풍경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설악산에 빠져, 내설악과 외설악 계곡을 다 돌면서 설악산을 스케치하고 작품을 구상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설악산을 주제로 한 작품이 상당히 많다.
그는 ‘소품(小品)’보다 ‘대작(大作)’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작업한 대작들만 70점이 넘는다. 그의 메인 작품으로 꼽히는 울산바위 그림은 3m42cm 높이의 대작이다. 그림으로 많이 다뤄지는 울산바위의 풍경과 차별성을 찾고자 했던 조 화백은 울산바위의 정면이나 측면이 아닌 후면을 그렸다. 조계암 암좌에 올라 본 울산바위의 뒷모습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했기 때문에, 그는 조계암 암좌를 시작으로 황칠봉 산 중턱에서, 또 없는 길을 개척해가며 10년 넘게 울산바위의 후면 작업을 했다. 이곳저곳을 오르내리며 차곡차곡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울산바위 작 ‘동해가 보이는 울산바위 소견’이 탄생했다.
그의 작업과정에서 볼 수 있듯, 그는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한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조 화백은 현장을 숱하게 방문한다. 계절별로, 시간별로 그곳의 풍경을 온 감각을 활용해 느낀다. 현장을 찾아 바람도 느끼고, 물도 만져봐야 그 느낌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현장을 방문해 느끼고 스케치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영감이 떠오른다. 그때가 실제 작업의 시작점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조 화백의 작품에서는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섬세함은 사전 연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속초8경’ 시리즈 작업에 들어선 그는 현재 ‘외옹치’ 작업을 앞두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구상은 이미 작년부터 시작되었다. 현장에 방문해 사진을 남기고, 관련한 자료들을 다각도로 수집했다. 이 자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압축시킨 후에야 구상이 시작됐다. 그래서 사전작업만 1년 넘게 지속되기도 한다. 실제 한국화 작업 기간인 2~3개월의 몇 배가 되는 기간이다.
그는 현실적인 작업을 많이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반추상’, ‘추상’ 작업에 몰두한 시기도 있으나, 일반인들이 설명 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구상’ 작업으로 돌아와 시대의 실물을 남기기 시작했다. 후세대에서 작품을 보고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작업을 선호한다. 시간이 지나면 자리가 바뀌고 잊힐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림으로 남겨 기록한다.
“기록화는 후세에는 못하고, 바로 지금만 할 수 있어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작품에는 자부심도 더해지죠.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에 잘 담아야 합니다. 이론이 바탕에 깔리고, 그 위에 새로운 창조물이 나와야 해요.”
한국화 알리며 먹노리 만들어
조정승 화백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속초로 이주해 정착한 지 31년을 맞았다. 오래전, 가족과 함께 대관령을 넘어 속초로 오던 길에 만난 풍경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울산바위와 달마봉 사이에서 만난 계곡의 장관에 그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속초로 이주한 조 화백은 지금까지 설악산을 주제로 다양한 작업을 이어왔다.
그가 이주했던 1993년의 강원도는 회화, 특히 한국화 분야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활발한 사진예술 분야에 비해 불모지와 같았던 한국화를 강원 영동에서 뿌리내리자는 사명으로,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한국화를 알리기 위해 속초교육문화관, 평생교육센터 등에서 한국화 수업을 열었고, ‘먹노리’라는 한국화 동아리도 만들었다. 먹노리는 매년 7월 중순에서 8월 즈음, 시립박물관에서 한국화 전시회를 연다. 꾸준히 전시회를 연 지 햇수로 10년을 채우면서, 이제는 여름방학 때마다 시립박물관에 들러 한국화 전시를 보고 가는 타 지역 팬층도 생겼다.
조정승 화백은 지난 11월 11일 11시 11분, 보광사 개산 400주년 기념 타입캡슐 안에 그의 작품 <보광 사계화>도 함께 담아 봉인했다. <보광 사계화>는 40m의 족자로 보광사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담겨있다. 작가는 시대를 작업에 담고,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조정승 화백. 그가 타임캡슐과 함께 묻은 작품 <보광 사계화>는 그의 바람대로 타임캡슐이 열릴 100년 뒤 후세에 재평가될 것이다.
정미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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