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문득 눈을 들어 보니 단풍이 속초시를 감싸 앉고 있는 청대산 자락까지 내려앉고 있었다. 단풍이 절정이구나…. 그러고 보니, 올해는 제대로 된 단풍 구경을 하지 못하고 지나고 있다는 생각에 청대산 자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봄에서 겨울까지 설악산이 선보이는 풍경은 늘 감탄의 대상이지만, 가을의 설악은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처음 설악의 단풍을 맞닥뜨렸던 1976년 가을의 어느 한 장면이 오랫동안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해 여름쯤이었다. 우리 가족은 시외버스터미널 뒤 동명동 문간방 생활을 접고 설악동으로 이사했다. 가족의 생계를 걸기에 설악산 자락이 그나마 나았기 때문이었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는 바퀴 3개 달린 용달 트럭 조수석에 앉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들뜨기만 한 일이었다.
부모님은 지금의 설악산국립공원 버스정류장 위쪽에 자리한 북당골(골짜기 안쪽에 무속인들이 기도처를 많이 마련해 무당골이라고도 불렸다) 마을에 짐을 풀었다. 동갑내기 손민희네 문간방이었다.
“흰 구름 덮인 설악산으로 그대와 손잡고~~휘파람을 불면서 하이킹 가자~”
학교에서 돌아오노라면 아직 도립공원이었던 설악산 공원 안팎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무렵에도 단풍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단풍빛을 닮은 색상의 옷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공원 안팎에 그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또래들과 함께 북적이는 인파 속과 여인숙과 기념품 가게, 음식점 사이 좁은 골목길을 헤집으며 정신없이 놀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왁자지껄한 장마당의 소음이 점차 멀어져갔고 마을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니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던 그때였다.
온 사방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울긋불긋 물들어 있던 단풍도 얇은 황금빛 망토를 두른듯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었을까? 기억은 희미하지만 숨이 멎을 듯 황홀했던 장면은 40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후로도 설악이 주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여러 번 접할 수 있었다. 오련 폭포의 상쾌한 바람과 폭포가 뿜어내는 비말, 그리고 단풍과 절벽이 어우러진 풍광은 말 그대로 선경(仙境)이고, 희운각 빨딱고개 마루에 올라 건너본 공룡능선, 용아장성의 장쾌한 단풍은 가슴 속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필례약수 입구의 단풍나무길은 짧으나 화려하고, 남설악의 흘림골의 가을 단풍은 천불동을 작게 축소해 옮긴 듯 아기자기 어여쁘다. 그러나 1976년 가을, 처음으로 내 마음을 붉은 황금빛으로 물들였던 단풍만큼 강렬한 인상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살면서 그때 보았던 그 단풍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매해 같은 단풍이 물드는데 바라보는 내가 변해서 못 느끼는 것일까? 한 달 남짓 설악산 일원을 물들였던 단풍이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 단풍을 느끼기 위해 시간을 내야겠다. 어쩌면, 1976년 가을의 황홀경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오성택
설악프로방스배꽃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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