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마음 / 박일환
김치를 제대로 담그려면/ 배추의 숨부터 죽여야 한다//
굵은 소금으로 뻣뻣한 기운 눌러주고/ 풀어진 숨구멍마다 소금기 배어들면/ 준비는 다 된 것이니// 누구에게나 영광의 시절은 있었노라/ 읊조리며, 숨죽인 배춧잎에/ 붉은 양념을 버무리는 손길들// 잘 익은 김치를 먹을 때마다/ 온순한 인간이 되고 싶었을까?//
먹고 살겠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의 숨부터 끊어놓고 보는/ 오랜 습속은 잠시 잊고/ 흐뭇한 미소부터 짓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돌아보는 마음이 없으면/ 경배하는 자세는 모두 헛것일진대//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11월이다. 11월 날씨답지 않게 덥다 싶더니, 이내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최근 들어 환경변화에서 오는 이상기후의 증상을 몸으로 직접 겪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환경단체와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일들이 먼 훗날의 이야기로 생각했었는데, 이젠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다. 집에서는 김장이 걱정되는지 은근 조바심을 내고 있다. 필자는 음식 욕심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맛에 대해서는 민감한 편이다. 특히 김치맛을 따지는 편이다. 음식점에 가서도 주 음식보다도 김치맛을 먼저 보고 나서 다시 올 집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겨울철 김장을 하는 일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김치 한 포기가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주재료인 배추 한 포기가 집에 오기까지 밭 갈기, 이랑 만들기, 모종 심기, 거름주기, 잎차례, 결구, 묶어주기, 거두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곁들어져야 하는 파, 고춧가루, 소금, 젓갈 등 양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여러 단계의 손길과 자연의 힘이 필요하다.
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우리가 살기 위해 먹는 음식물을 만드는 일은 결국 다른 생명의 목숨을 끊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노랗게 속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 밑동을 도려내어 배추의 숨을 끊는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속이 보이도록 두 동강을 낸다. 거기에다 부드러워지라고 굵은 소금을 뿌려 숨을 죽인다. 인간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고춧가루와 액젓과 무채를 한데 버무린다. 그리고 벌겋게 버무린 다음 예전에는 땅속의 항아리 속에서, 지금은 김치냉장고에 담아 또 한 번 숨을 죽인다.
이렇게 누군가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몇 번의 숨줄을 놓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생태계의 원리라고 하면서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단어로 죄책감을 덜어낸다.
박일환 시인은 ‘잘 익은 김치’를 앞에 두고 ‘온순한 인간’을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나마 온순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굵은 소금’을 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겠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의 숨부터 끊어놓고 보는’ 인간의 습성을 잠시 잊고 살고 있다고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다. 배추는 노란 고갱이로 꽉 차 있을 때가, 고추는 빨갛게 익었을 때가 영광의 순간이다. 그 순간을 지나 숨을 죽여야 비로소 누군가를 살리는 힘이 된다.
필자도 이미 영광의 순간을 지난 시간을 살고 있다. 항아리 속에서 다시 한번 숨을 죽이며 익어가야 하는 시간인데, 하는 짓은 아직 소금도 안 뿌려진 뻣뻣한 배춧잎이다.
계묘년 한 해도 이제 한 장의 달력만이 남아있는 지금.
지난 시간 동안 필자는 ‘온순한 인간’이었는지를 반성하는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김종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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