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대’란 이름의 봉우리가 전국 곳곳에 있으니, 우리 설악산에만도 세 곳이나 된다. 인제 오세암 인근의 내설악 만경대, 속초 화채능선의 외설악 만경대, 그리고 양양 오색의 남설악 만경대가 그것이다. 우리 설악의 만경대들도 내설악, 외설악, 남설악이 각기 가지고 있는 특성을 저마다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들이다. 특히 ‘남설악 만경대’는 오색 흘림계곡과 주전계곡 사이에 자리 잡고 있고, 정상엔 가로 세로 각 5m의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어, 남설악의 숨은 비경과 주전골까지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 중의 명소이다. 그러나 ‘남설악 만경대’는 1968년 탐방로가 폐쇄되고, 1970년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 만경대가 10월1일부터 11월15일까지 45일간 임시 개방된다. 상설 개방 여부는 추후 결정된다고 한다.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 용소폭포, 만경대를 거쳐 오색약수터로 돌아오는 총연장 5.2㎞의 둘레길이 새로 개발된 것이다. 48년간이나 통제되던 곳이니, 원시림 그대로 태고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리라.
오색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이 만경대에 대한 추억이 남다르다. 만 가지의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문자적인 해석 뒤에 숨어있는 ‘만 가지의 추억’. 나만큼 만경대에 관한 살가운 추억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사진 속의 까까머리 미소년은 바로 나, 48년 전 오색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다. 우리 마을 ‘계씨 아저씨’는 나를 친구 삼아 이곳에 함께 올랐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임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때 계씨 아저씨의 일상적인 터전이자 놀이동산이었기 때문이다. 계씨 아저씨는 대청봉 짐꾼이었다. 남들은 하루에 한번 나르기도 벅찬 음료수와 술 박스를, 계씨 아저씨는 하루 두 번씩이나 대청봉으로 지어 날랐다. 타고난 산꾼이었다. 1990년대 말 오색에서 출발해서 대청봉을 넘어 천불동을 달리는 산악마라톤대회가 열린 적이 있는데, 계씨 아저씨는 우리 마을 대표로 참여해 당당 2등을 차지했다. 전국에서 모인 건각들이 사전 답사니 준비운동이니 하며 온갖 법석을 떨어도 그저 태연하기만 하던 그는, 경기가 시작되자 마실 나가듯 가벼운 차림으로 사뿐히 산을 넘었다. 그 의연한 모습이 지금도 전설처럼 전해지며 우리 마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아저씨를 따라 만경대에 올랐던 그 날로부터 꼭 36년이 지난 2004년 2월, 나는 그를 졸라 다시 여길 올랐다. 이미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던 아저씨는 몇 해 째 내 성화에 시달리며, 같이 올라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였다. 내 주문은 바로 그날처럼 저 남설악에 잔설이 성성할 때 오르자는 것이었으니, 이미 늙은 그로서는 눈길을 해쳐 그곳까지 오르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어느 날 그는 맘먹고 단장을 하여 나를 불렀다. 손으로 깎은 지팡이를 들고, 새로 산 등산화를 신었으나, 그 안에는 유행 지난 등산양말이 보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꺼이 올라주었다. 이윽고 만경대에 올랐을 때, 지난 시절 나를 안아주었던 아저씨의 어깨를 이번엔 내가 안아드렸다. 예전의 나를 안아주던 그 어깨와 그 손의 감각이 계씨 아저씨에게 그대로 전해지기를 기원했다. 몇 해 전, 계씨 아저씨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또다시 세월이 흐른 지금. 내게 48년 전의 기억과 만 가지 추억을 안겨준 그 만경대가 다시 개방되는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앨범을 뒤적여 그 당시의 사진을 찾아내 살펴보며 새삼 추억에 젖었다.
남설악 비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곳, 동해 고래가 설악비경을 구경하려고 남대천을 따라 올라왔다가 그만 그대로 굳어버린 고래바위며, 사주전(私鑄錢)을 만들며 관가를 암행했다는 망대바위, 그리고 길을 물으면 침묵으로 답해주던 만경송(萬景松)을 지나, 추억의 만경대에 다시 올라 그 시절을 반추해 볼 생각이다.
일찍이 고려시대 안축은 우리 지역을 여행하며, 금강산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않고,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않은데, 설악산은 수려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다(金剛秀而不雄, 知異雄而不秀, 雪嶽秀而雄)고 노래했다. 이렇듯 수려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설악 중에서도, 남설악은 여성적인 부드러움까지 갖추고 있다. 과연 중국의 장가계가 이만할 것인가.
언제나 그렇듯 대한민국 단풍은 설악에서부터 시작된다. 46년 만에 개방되는 이곳 만경대를 올라, 새롭게 시작되는 올 가을 단풍과 반세기 동안 감춰온 최고의 비경을 만끽하며, 만 개의 추억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
홍창해 / 양양군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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