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마음이 너무 무겁고 죄송하다” 검사 “50여년 전 검찰 잘못 사과한다”
“반공법 위반자라 자식들까지 피해”
“자식들 때문에 죽지 않고 참고 살아”
지난 9월 18일 오후 2시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101호 법정에서 납북귀환어부 32명이 54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이날 재심 대상자는 1969년 5월 28일 거진항으로 귀환해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납북귀환어부로 지난 2월 7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으며, 31명은 검찰 직권재심청구로, 1명은 당사자 재심청구로 재심이 개시되었다.
이날 재판에서 춘천지방검찰청 속초지청 박중웅 검사는 “50여년 전 검찰의 잘못에 대해 사과한다”고 발언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피의자들의 범죄 혐의 증거가 없으니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 이찬년 판사는 무죄 선고에 앞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발언을 경청하고, 피해자와 가족들이 겪어온 어려움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발언을 했다.
이날 재판에는 생존자 5명 중 2명과 고인이 된 피해자 5명의 유족도 함께 참석했다. 생존 피해자는 지난 50여년 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울먹이며 피해사실을 호소해 법정을 숙연하게 했다.
이번 재판에 앞서 지난 8월 30일에도 속초법원에서 납북귀환어부 23명이 재심 무죄선고를 받은 바 있다. 이날 재심 무죄선고로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동해안에서 재심 무죄선고를 받은 납북귀환어부는 모두 150명에 이른다. 이중 검찰 직권재심청구로 이뤄진 무죄선고는 72명으로, 속초지청이 지난해 11명, 올해 53명 모두 64명이며, 영덕지청이 8명이다.
이날 무죄 선고로 명예를 회복한 32명은 다음과 같다. △길성호=강석돌, 박철주, 김명수, 이화선, 최귀석, 정순원 △기성호=황봉춘, 김대진, 김인도, 오은제 △대동2호=임근식, 윤상국, 이택현 △준호=전종수, 성임수, 전보수, 명복출, 최해진 △청길호=김용걸, 이영창 △월진호=김용운, 이일생, 김춘소, 안술이, 이춘성, 전금석 △어제호=김후봉, 천윤이, 이충계 △왕양호=최찬우, 이정호 △용명호=김득수.
다음은 이날 재판에서 검사와 판사, 피해자 및 유가족이 발언한 내용이다.
■무죄구형 박준웅 검사
직접 재심청구를 준비하면서 유족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족분들도 아주 오랫동안 힘든 생활을 겪어오셨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도 굉장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피고인들은 동해 어로작업 중에 북한경비정에 피납되었다가 조국으로 돌아왔고,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피고인들은 수사와 재판 후에도 낙인효과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피해와 고통을 입었습니다. 북한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피고인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수사과 재판을 받는 동안에 기본권 보장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과거 50여년 전 검찰이 이 사건과 관련해서 적법절차의 준수와 기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현재 검찰의 일원으로서 피고인들에게 깊이 사과드립니다.
검찰은 납북귀환어부들의 명예를 신속히 회복하고 권리를 구제하기 위해서 전국 여러청에서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재심사건 중에는 검찰이 직권으로 청구한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청구를 진행한 사건도 있지만, 피고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실추된 명예, 기본권을 보장하지 못한 국가기관으로서 과오는 차이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사건 피고인에 대해 불법구금 상태에서 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으며, 이를 기초로 한 피고인들의 법정진술 역시 임의성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피고인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피해자 최해진(75세, 부산 거주)
우리가 탄 배는 준호라는 기선저인망 데구리배이다. 우리는 작업하는 장소에 어구를 떨어뜨려놓고 납북이 되었다. 그 어구가 떨어진 자리가 어로저지선을 넘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해서 잡혀간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와서 잡아간 건데, 그게 뭐 죄가 된다고, (외항선 승선) 선원수첩도 낼 수 없고, 아는 건 배밖에 없는데, 뭐 하나 하려고 해도 반공법 위반 빨간 줄 때문에 내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아버지가 반공법 위반자라 자식들이 공부를 마치고 취직을 하려도 영향이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 억울하게 살아왔다. 가진 게 없어서 배를 탄 게 죄라면 죄인데, 왜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는지, 정말 너무 억울하다.
■피해자 이춘성(81세, 고성 대진 거주)
북에 잡혀갔다 와서 25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 이틀 아니면 사흘에 한 번씩 기관에서 찾아와 가지고 어디 가지를 못했다. 어디를 다녀왔느냐, 뭐하러 갔느냐, 누굴 만났느냐, 뭘 했느냐, 계속 25년 동안 이렇게 살아와서 만성이 되어버렸다. 중간에 딴 생각도 몇 번 씩 했는데, 정말 자식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전에는 너무 힘들었다. 같이 북에 갔다온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는데, 나는 술담배를 못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 같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은 매일 그렇게 당하니까 술로 살다시피 해 일찍 죽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마음이 불안하다. 앞으로 마음이라도 좀 편하게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
■피해자 고 김명수 자녀 김○길
20대 초반에 속초경찰서에 취업을 하려고 이력서를 냈더니, 아버지가 이북 갔다오신 게 걸려서 취업이 안 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 경찰이 찾아와서 우리 식구들은 전혀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아버지를 취조하고. 그렇게 고통받았다.
■피해자 고 김용길 자녀 김○녀
아빠는 1969년 귀환하셨고 나는 1975년생이다. 기억이 나는 건 1986년 초등학교 4학년 때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으면 항상 사복경찰이 노려보고 있었다. 납북귀환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감시를 심하게 받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납북에 대해 한 번도 말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잘 몰랐다. 아빠는 술에 의지해서 살았던 거 같다. 그래서 가족들도 많이 힘들게 살았다. 지금이나마 아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아빠가 명예회복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피해자 고 김후봉 자녀 김○자
어릴 때 아버지가 북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와서는 여기서 못살겠다고 고향 제주도로 갔는데. 형사들이 일주일에 두 세번씩 찾아와서 아버지가 일을 못 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3년 후에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는 어렸을 때 고생을 말도 못하게 많이 했다. 아버지는 맨날 어디 끌려갔다 오시면 몸살을 앓고 그러셨다.
■피해자 고 이정호 자녀 이○철
아버지가 많이 끌려다니신 것 같다. 나중에 고통이 심해 술로 사시게 된 걸 이해하게 되었다. 원인도 모른 채 수시로 많이 아팠다. 고문을 많이 당하신 것 같다. 60세 되는 해에 자살을 하셨다.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심했던 것 같다. 이 자리가 만들어진 것에 감사하지만, 한편으로 가슴이 아프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
■무죄 선고 이찬년 판사
말씀을 들을수록 더 송구스러워집니다. 그동안 겪으신 고생,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출세길도 막히고 여러 고통 속에서 제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살아오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무겁고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주신 말씀, 감히 헤아릴 수 없지만 깊이 공감을 하고 앞으로 그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저도 공무원의 일원이니까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재판하는 분들과 공유할 게 있다면 공유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너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살아계신 피해자 분들) 앞으로 조금이라도 즐겁게 생활하실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엄경선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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