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종
속초고 21회 관악부 출신
관악부가 너무 멋있어서
속초고 21회 졸업생인 필자는 관악부 출신이다. 클라리넷 파트에서 활동을 했고 3학년 때는 악장(樂長)으로 활동을 했다. 그래서 작년 2월부터 12월까지 <설악신문>에 연재되었던, <우리 지역 관악부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 그 글을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필자의 관악부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곤 했다.
그 글의 필자 임수철 작곡가는 나와 함께 관악부 활동을 했던 2년 후배이다. 그래서 더더욱 관심이 가는 글이었다. 그러다 나도 한번 우리 지역 관악부와 관련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글재주는 없지만 소박하고 진솔하게 쓰면 될 것 같다는 용기를 가지고.
필자는 관악부가 너무 멋있어서 입단을 했다. 1971년, 속초중 3학년 때였다. 당시, 속초중에서 어떤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에 속초고 관악부가 참여하였는데, 속초고 관악부 악장 형이 지휘하는 모습과 그 지휘에 맞추어 연주를 하는 관악부원 형들의 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연주가 끝난 다음 속초중 음악 선생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때 필자는 속초고에 입학하면 관악부에 꼭 입단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1972년 속초고에 입학을 했는데, 입학 후 어느 날 관악부 3학년 선배 형들이 관악부원들을 선발하기 위해 우리 반 교실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자발적으로 입단을 하려는데, 그날 마침 동네 선배 형이 필자에게 입단 권유 지목까지 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관악부원이 되었다.
고물상에나 가야 할 악기들이었지만
그날 그렇게 입단한 필자는 입단 동기생들과 함께 방과 후 음악실에 모였다. 그리고 각 파트별 악기들을 지정받았다. 필자는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지정받았다. 그런데 음악 환경은 너무도 열악했다. 음악실은 협소했고(그나마 나중에 그 음악실마저 없어짐), 대부분의 악기들은 폐기 처리해야 할 정도로 노후 되어 있었다.
클라리넷은 키(key) 스프링이 빠져서 고무 밴드가 대신했고, 트럼펫은 속칭 배꼽이라고 하는 배수(排水) 키(key)가 떨어져 나가 그 부분을 납땜으로 대신했다.
3학년 때 악장이 되어 전체 악기를 점검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튜바라는 악기에 ‘마산상고’라는 선명한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러니까 그 악기는 경남 마산상업고 관악부에서 사용하다가 폐기 처분된 게 중고시장을 통해 속초고로 흘러들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1950년대에 제작된 악기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 고물 악기로 선배 형들은 그동안 멋진 연주를 해냈던 것이다. 선배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더구나 지도교사도 없는 상황에서 음악 환경이 그렇게 나쁜 관악부에서 박태이(18회) 선배와 임수철(23회) 후배같이 뛰어난 음악 전문가가 배출된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된다.
열악한 음악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입단 후 바로 다음 날부터 강도 높은 연습이 시작되었다.
기본 음계에 따른 기초 포지션 연습부터 선배들과 함께 했다. 모두들 소리를 잘 냈다. 그런데 필자는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하지만 꾸준히 연습을 했더니 일주일쯤 되자 드디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정말 기뻤다.
연습은 당시 악장이었던 3학년 허승훈 선배 형(19회)이 주도했는데, 말하자면 승훈이 형이 관악부 지도교사 역할을 했다. 승훈이 형은 트럼펫 파트였는데, 악장으로서 통솔력과 지도력, 그리고 연주력까지 3박자를 모두 갖춘 실력파 선배였다.
어느 정도 악기에 익숙해지자 애국가, 묵념곡, 교가 등 행사에 필요한 기본 의식곡부터 한 곡 한 곡 연습했다. 악장 승훈이 형은 곡마다 계명이나 악보를 빨리 외워 오라는 숙제까지 내주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계명을 외우는 데 전념을 했다. 점심 시간에는 학교 악기 보관창고 옆에서, 그리고 정규 수업이 끝나고는 학교 뒤 야산에서 연습을 했다.
(지금의 ‘늘푸른아파트’ 자리. 그때 속초고는 지금의 교육청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빈 교실에서 연습을 했다.
갑자기 잡힌 행사 스케줄
기본적인 의식곡들을 연습하던 중에 행사가 잡혔다. 제대로 연주도 못 하는데 행사라니? 신입 부원 입장에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악장 승훈이 형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행사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갔다. 신입 부원인 1학년도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하고, 클라리넷, 알토색소폰, 테너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알토혼, 유포늄, 튜바, 타악기 등 이렇게 파트를 정했다.
악대의 대형은 4열 종대(縱隊)로 했는데, 연주를 잘하는 3학년 형들은 왼쪽 열에, 연주를 제대로 못 하는 1학년은 오른쪽 열로 배열했다.
행사장소는 속초중학교였는데, 당시는 지금의 교동우체국과 문우당서림 일대가 모두 속초중 교정이었다. 그 행사는 속초여중(지금의 해랑중) 합창단과 함께 하는 행사였다. 그래서 행사 당일 속초여중으로 가서 당시 속초여중 이재균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그날 행사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합창단과 합동 리허설을 했다.
속초고 관악부 등장에 여학생들이 난리
속초여중에 속초고 관악부가 나타나자 여학생들이 우르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선생님들이 몰려든 여학생들을 통제하시느라 진땀깨나 흘리셨다.
그렇게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을 제어하시고 나서 관악부와 합창단이 운동장에서 합동 리허설을 하는데, 이번에는 속초여고 쪽에서 난리가 났다. 당시 속초여고는 지금의 교육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속초여고에서 내려다보면 속초여중 건물과 운동장이 훤히 다 보였는데, 속초고 관악부의 리허설 연주가 시작되자 속초여고생들의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터졌다. 속초여고생들이 속초고 관악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는 속으로, 속초고 관악부가 여학생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좋나 생각했다. 하지만 신입 부원으로서는 마음이 좀 켕기는 것 같았다. 신입 부원들은 연주 능력이 부족하여, 노래로 말하자면 거의 립싱크처럼 연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악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런 내막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남자 선생님께서 관악부 대열 쪽으로 다가오시더니 필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악장 형의 지휘봉을 보면서 발로 박자를 맞추고 입과 손가락으로 연주가 아닌, 연기를 하고 있는 필자의 발을 막대기로 누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힘들지?”
그 순간 얼마나 창피했던지. 아무튼 그날 그 행사는 무난하게 잘 치렀던 것 같다.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1학년 부원 친구들에게 리허설 때 겪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1학년 부원 모두가 다 리허설 때 그 남자 선생님께 그런 지적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창피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때 우리 1학년 부원들은 음악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분에게는 그런 연기가 안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정말 열심히 연습을 해서 연기가 아닌 진짜 연주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관악부에 매우 부정적이던 담임 선생님
그렇게 행사를 잘 마치고 악기 정리를 한 후 교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아주 심한 꾸중을 하셨다. 관악부 때문에 반 학습 분위기가 깨진다는 것이었다. 학생이 참여하는 공식 행사는 어떤 행사든 학교장의 최종 결재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악부 행사야말로 가장 확실한 현장 체험 학습이며, 더구나 관악부가 우리 지역 행사 참여를 하여 음악 봉사도 하고, 학교 이름도 홍보하고 왔는데, 칭찬은커녕 호된 꾸중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일부 선생님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관악부에 대해 무관심하셨다. 그리고 또 일부 선생님은 무척 부정적이셨는데, 필자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거의 병적으로 관악부를 싫어하셨다. 담임 B선생님은 명문 K국립 사범대 출신이었다. 하지만 출신 대학이 무색할 정도로 교육자로서 인성에 문제가 많은 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필자와 같은 반 관악부원 중에서 담임 선생님의 심한 언어적 신체적 체벌, 아니 폭력으로 학교를 그만둔 친구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정말 집요하게 관악부원들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괴롭혔는데, 담임 선생님의 그런 비교육적인 행위는 관악부 탈퇴가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관악부가 아닌 친구나 선후배들 중에서도 담임 선생님의 그런 비교육적인 괴롭힘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거나 엇나간 경우도 있었다.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당시의 학교 현장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 시절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이었다. 그래서 국민들 인권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학생들 인권에 대해서도 기본 개념조차 없었다.(그래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도 탄생된 것 같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다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페스탈로치 못지않게 훌륭한 선생님도 계셨다.
아무튼 필자는 그런 담임 선생님 때문에 관악부 활동을 하면서 정말 많은 고난과 수난을 겪었는데,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또 할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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