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도 열심히 하고, 행사를 통해 현장 연주 경험도 쌓으니 연주 실력이 상당한 수준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행진곡뿐만 아니라 무대 연주용 곡도 연습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곡 중 하나가 ‘십자훈장 서곡’이었다. 이 곡은 18회 박태이 선배가 악장으로 활동했던 1971년, 속초고 관악부가 영북지역 합주경연대회에서 1위를 했을 때 자유곡으로 연주했던 곡이었다고 한다.(지정곡은 <우리 지역 관악부 이야기>에서 23회 임수철 후배가 언급한 바와 같이 ‘다뉴브강의 잔물결’)
그리고 어떤 선배는 그 대회에서 ‘인도의 여왕’이라는 곡도 연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 곡을 모두 다 연주하면 20분도 더 걸리므로 ‘십자훈장 서곡’과 ‘다뷰브강의 잔물결’ 이렇게 두 곡만 연주했던 것 같다. 당시 중3이었던 필자는 대회 현장에 없었으므로 단정적으로 얘기는 못 하겠다. 하지만 여러 개 팀이 출연하는 대회에서 세 곡씩이나 연주한다는 것은 시간 운영상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십자훈장 서곡’ 다음 곡으로는 ‘홈 스위트 홈 왈츠곡(Home Sweet Home Waltz)’ 을 연습했다. 그런데 필자 취향에는 연주회용 곡보다는 행진곡이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악장 형이 결정한 것이라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런 가운데 군부대(동해안경비사령부)에서 또 행사 요청이 들어왔다. 속초고와 자매 결연을 맺기도 했던 그 부대는 6·25한국전쟁 때 창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대 창설기념일을 맞이하여 인근 고등학교 체육부와 지역주민들도 초청해서 체육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행사에 관악부가 지원을 나가게 된 것이다.
그 행사에서 속초여고 육상부와 속초실업고(지금의 설악고)등이 참가하였는데, 속초고 관악부는 행진곡과 학교 선생님들 몰래 연습한 대중가요도 연주했다. 그렇게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가 결승점을 항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래서 결승지점에서 선수를 위한 축하 연주를 하는데, 1등으로 들어오는 한 선수가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선수는 중간에서 기권을 하고 귀대 중인 선수였다. 그래서 행사장에서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행사가 끝나고 장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느 장교분께서 관악부원의 개인 연주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클라리넷 파트의 3학년 이남익 형이 아주 멋들어지게 독주를 했다. 그때 연주했던 곡이 ‘롱롱 어고우(Long long ago)’ 변주곡이었는데, 그 곡은 상당한 기교가 필요한 고난도의 곡이었다. 하지만 남익이 형은 그 곡을 매끄럽게 잘 연주하여 아주 큰 박수갈채와 함께 앙코르를 받았다.
우리 관악부는 그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도 아주 푸짐한 군대 건빵 한 포대와 함께 군용 차량을 타고서.
군부대 행사에 웬 고등학교 관악부가? 하고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은 군사정권이라 군(軍)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관(官), 그리고 마지막이 민(民)이었다. 그래서 당시는 ‘군관민’이라는 용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데다가 학교와 자매결연 관계였던 부대에 군악대가 창단되기 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속초고 관악부가 그 부대의 군악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필 시험 보던 날에 관악부 행사
이런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군용 트럭이 와 있었다. ‘학교에 웬 군용 트럭?’하고 의아해하는데, 관악부는 속히 집합하라는 악장 허승훈 형의 호출이 있었다. 사전 예고도 없이 군부대 행사 일정이 갑자기 잡힌 것이었다. 대부분의 행사는 보통 일주일 전쯤에 연락이 오는 게 관례였다. 그래야 그 행사의 성격에 맞게 예행 연습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사전 연락 없이 갑자기 행사를 나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날이 바로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당시 속초고는 요즘 같은 중간고사니 기말고사니 하는 것이 따로 없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두 과목씩 시험을 치러서 그것으로 월말고사와 기말고사를 대신했다.
관악부원으로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당시 관악부원들 중에는 성적에 무척 예민한, 우수반 소속의 성적 상위권자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교장 선생님께서도 무척 난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군부대 요청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군부대 행사 지원을 나가게 되었는데, 필자를 비롯하여 관악부 친구들 생각은 여러 가지로 참 복잡했다. 시험도 못 보고 행사에 나갔는데, 학교에서 성적 처리를 과연 어떻게 할까? 우리 관악부원들만 따로 추가 시험을 볼까? 아니면…. 평소 성적이 별로 안 좋은 친구들은 체육특기생과 같은 혜택 점수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날 행사는 기본 군사교육을 수료한 훈련병들의 퇴소식이었다.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참여하게 된 행사였지만, 학교에서 하는 교련(敎鍊) 검열 행사와 비슷한 행사여서 관악부로서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곡, 애국가, 묵념곡, 임석 상관에 대한 경례곡 등등 평소에 하던 곡들을 연주하면 되었다. 그리고 훈련병들이 퇴소하는 날이라 행진곡 대신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예행연습도 없이 바로 행사를 치렀지만 무난하게 행사를 잘 치렀다. 행사를 그렇게 마치고 그날도 군용 차량에 푸짐한 군대 건빵을 싣고 학교로 돌아왔다.
시험은 물론 끝나 있었고, 그 시험을 치르지 못한 관악부원들의 성적 처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궁금증을 안고 교실로 돌아왔더니, 담임 선생님은 역시 또 심하게 꾸중을 하셨다. 예상대로였다. 필자와 담임 선생님과 그런 불편한 관계는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정말 질긴 악연이었다. 그리고 그날 갑작스러운 행사로 결시했던 두 과목 점수는 모두 최하점으로 처리되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받은 두 과목 점수를 나중에 만회하느라 고생깨나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도 필자에 대해 아주 안 좋게 기록을 해놓으셨다. 그 당시는 생활기록부 점수를 일반대학 입시에서는 반영하지 않았다. 면접 때 참고 자료 정도로는 활용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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