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가정폭력으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게 되는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 너무 화가 났다. “처음이 아니었을 텐데 왜 진작 헤어지지 못했던 거야? 왜 도망가지 못했던 거야? 저 정도인데, 왜 신고를 안 해.” 내게도 곧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피해자들의 모습 안에 나 자신이 보여서 많이 답답하기도 했다. 밤에는 그런 사건들이 내 일인 듯 눈앞에 재현이 돼서 잠도 잘 수 없었다.
2018년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 않고 있는 문제로 다투었던 적이 있다. 이전에도 보여줬던 남편의 폭력성은 조금만 내게 잘해주면 ‘내가 화난다고 애들을 데리고 뭘 어찌할 수 있겠냐’ 싶어 빨리 잊는 방법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그날, 나를 향해 흉기를 들고 쳐다보던 남편의 그 눈빛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뉴스에서 본 사건들이 내 머리에서 재현될 때마다 남편의 그 눈빛은 반복돼서 재생되었다.
남편이 큰소리로 억지 부리는 일이 시작되면 뉴스의 사건들처럼 내게도 그런 날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압박감에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내게는 악마 같은 사람이고, 게으르고 난폭한 사람이지만, 밖에서는 세상 예의 바르고 다정했던 그 사람이기에 차라리 큰 사건이 일어나서 그 사람의 실체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나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결국엔 우리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 같아서 정신 차리고 최선을 다해 잘 지내려고 했었다.
그 환경 속에서 나의 노력이라는 건 참고 참고, 덮고 덮고, 빨리 잊어버리는 것. 나는 그렇게 폭력이 익숙해져 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던 것은 남편이 자기의 감정으로 인해 아이에게까지 폭행을 저지르던 것이다.
이전의 상황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참을 수가 없고, 누군가에게 욕을 먹더라도 말하고 싶었다. 가정 안에서의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친정에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말할 상대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예전 친구가 결혼 후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 저기 도움의 전화를 걸었었다는 말과 함께 전해 들었던 가정폭력상담전화가 생각났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우울증이 생겨나고, 아무리 애써도 힘이 나질 않았으나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씩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아이가 현재 가해자가 된 남편의 모습이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더 이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막아야 된다고 늦게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보니, 어린 막내아이가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번 난폭해지면 어떻게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 친정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은 피해자 쉼터에 아이 셋을 데리고 입소했다. 사실 결정을 하기 전에 피해자 쉼터를 본 적은 없지만 상상을 했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철제 2층 침대가 있고, 여럿이 한 공간을 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와 아이들은 사면초가였고, 모든 경제권은 남편이 다 가져가서 시댁으로 빼돌리는 중이라 따로 집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어서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만 잘 견디자고 들어갔던 것이다.
당일까지도 내가 잘한 건지 잘 모르겠고, 어린아이들이 잘 견딜 수 있을지 미안한 마음도 컸고 막막했으나, 남편이 언제 어떻게 할지 모르는 위험한 집보단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울 때 용기와 도움받은 것처럼
선한 영향력 가진 사람들 되길 기도”
아이들과 나는 용기 내어 쉼터에 들어가게 되었고, 내가 예상했던 차가운 공간이 아닌, 평범한 가정집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 환경은 아이들이 금세 적응하고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엄마에겐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던 환경이다.
그 안에서 상담도 받고, 여가도 즐기다 보니 아이들이 불안감 넘치는 집에 있는 것보다 더 좋다고 얘기할 정도로 우리는 그 시간을 소중하게, 즐겁게 보내려고 했다. 다들 나보고 아이 셋을 데리고 나와 용기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잘 지내는 아이들 덕분에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 예상과 다르게 코로나19로 인해 점점 길어지는 소송은 우리가 쉼터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끝나지 않았고,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자립을 한 상태이지만 나는 감사를 느낀다.
내가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의 거짓 공격이 있을 때면 무너지고 싶은 마음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아이들에게도 예민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쉼터에서는 낮이든 밤이든 괴로워하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 아이들을 응원해주고,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내가 자립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아이들은 매일 같이 우리들이 따뜻하게 누워있는 자리에 감사하고, 우리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에 행복해한다. 또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용기와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용기를 주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익명>
속초YWCA 부설 햇살의집은
2003년 7월에 개소하여 가정폭력으로부터 피해 여성과 동반아동을 보호하고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며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폭력피해여성과 동반아동의 폭력 후유증 치유와 자립을 위하여 생활지원, 의료·심리치료 지원, 자립지원, 동반자녀지원, 수사·법률지원, 긴급상담, 사후관리 등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보호대상 : 가족과 전남편, 동거인 등에 의한 신체적 폭력만이 아니라 언어폭력, 정서적, 스토킹, 경제적, 성적으로 가정폭력의 피해로 고통받는 여성과 동반자녀
·보호기간 : 6개월(3개월씩 2회 연장 가능)
·문의 : 033-635-3520, 3529
속초YWCA 햇살의집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