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날씨 변화로 가을을 없이 겨울이 오는 듯하다. 뿌연 하늘은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다. 오전 출근을 하며 바라다 본 하늘에 문득 작고하신 사범학교 동창이셨던 두 분 선생님이 생각났다. 엄청 나를 예뻐하셨던 분들이라 가끔 밥과 차 한 잔을 함께 나누던 분들이셨는데 이제는 그 두 분을 뵈러 강릉 나갈 일이 없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십 여 년 전 크리스마스 때였던 것 같다. 오후가 되자 하늘에서 굵은 눈발이 비치더니 세상을 하얗게 뒤덮기 시작했다. 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박명자 선생님의 전화였다. 오랜만에 이충희 선생님과 함께 밥도 먹고 강릉에 새로운 커피집이 생겼다며 구경 가자고 하셨다. 눈은 내리고 한 시간 가량 걸리는 운전길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오랜만에 뵙는 선생님들 안부가 궁금했기에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었더니 점심 식사는 꿀처럼 달달했으며 즐거웠다. 두 분 선생님 앞에서 나는 종알종알 떠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유명한 커피숍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 대목이 겹쳐 주차장부터 만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한 커피향이 진동을 했다.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실내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커피콩들은 함지박과 소쿠리에 가득 담겨 아기자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인테리어 가구나 소품들도 유럽식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한 30여 분을 기다렸을까,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2인용 테이블이 났는데 거기에 앉든지, 아니면 30여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셋이서 보조의자를 놓고 앉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아르바이트생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며 우리는 낯선 커피 이름 앞에서 무엇을 골라야할지 몰라 그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달달한 것을 먹고 싶다며 캐러멜 이름이 든 커피와 치즈케익을 시키셨고, 이 선생님과 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에스프레소, 그 것도 더블로 간신히 주문을 끝냈다.
드디어 우리가 주문한 커피와 치즈케익이 나왔다. 그런데 세 잔 중 박 선생님 커피는 커다란 머그컵에 잔뜩 넘칠 만큼 담아왔는데, 나와 이 선생님의 커피는 간장종지만한 아주 작은 컵에 담겨 있었다. 메뉴판을 보고 에스프레소 더블이라는 글귀에 더블이 두 배라 왠지 더 많을 것 같아 그것을 선택했는데 말이다.
“아니 뭐야? 왜 이리 작아? 그런데 왜 더블이라고 이름 붙인 거야?”약간 불만이 있었지만 우리 둘은 그래도 분위기를 잡고 그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입을 대는 순간 나와 이 선생님은 동시에‘윽’소리를 내며 휴지를 입에 가져가 뱉고 말았다. “무슨 커피가 이리 쓰지? 아 너무 쓰다. 생전에 태어나 한약만큼 쓴 커피는 처음일세, 아휴~ 못 먹겠지?”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 선생님을 보시더니 박 선생님도 뭔데 그리 쓰냐며 찻숟가락으로 한 스픈 떠서 맛을 보시더니“와우~, 뭐 잘못 나왔나 보다.”하시며 인상을 찌푸리셨다.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물을 더 달라고 주문하며“무슨 커피가 이리 쓰죠?”하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저 이건 원래 이렇게 드시는 건데요.”하며 돌아섰다. 우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다고 설탕을 달라고 했더니 시럽이라고 하면서 참새 눈물만큼 가져왔다. 물을 더 붓고, 시럽을 더 달라고 해서 부을수록 커피 맛은 이상하게 변해갔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날 이게 웬 낭패냐며 잘못 왔다고 값만 비싸고 바가지 썼다고 푸념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옆 테이블의 젊은 부부 중 남자가 다가오더니 에스프레소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소동을 멈추고 급히 앞에 놓인 케익을 입에 넣었다. 케익으로 간신히 쓰디쓴 입맛을 달랜 우리는 그곳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날 눈 속을 한 시간정도 운전하며 돌아오는 내내 나는 에스프레소의 그 쓴 맛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젠 나를 사랑해주셨던 그분들을 뵐 수 없음에 때론 미소 속에서 아련한 슬픔이 전해지곤 한다.
가끔 친정이 그리울 때 갔던 강릉, 그 속에서 뵈었던 따뜻한 언니 같았던 그분들, 속상하다며 달려 나가 하소연을 하면 등을 토닥, 토닥거려주시며“애썼다.”“애썼어.” 해주셨다. 때로는 누군가에 등처럼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었는가를 새삼 느껴진다.
어느 동영상 강의에서 야구의 정현욱 같은 중간 계투 투수인 미들맨, 축구의 박지성처럼 공격수를 뒷받침하는 미드필더, 유명한 영화와 배우를 뒷받침하는 스태프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우리에게‘에스프레소’맨이 되라고 당부했던 동영상이 생각이 났다.
과연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에스프레소 같은 사람이었을까?
나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모든 커피의 기본이 되는‘에스프레소’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학교에 가져다 놓은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에스프레소 진한 커피 향에서 두 분의 모습이 더 아른거린다. 참 뵙고 싶다.
*2022년 1·2월 111호 월간 신문예(수필) 등단작.
서미숙
설악문우회 갈뫼 사무국장
전 속초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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