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연말이다. 시간의 흐름이 속절없이 빠르다. 한 해가 시작되는 달력의 첫머리를 펼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달랑 한 장 남았다. 그렇게 저물어가는 끝자락에 서면,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된다. 올 한 해를 돌아보는 필자의 화두는 ‘비움’과 ‘채움’이다.
먼저 멕시코 작가 카르멘 코랄레스의 그림책 <세상에서 제일 큰 상자>부터 이야기 해보자.
욕심 많은 고양이 레오노라는 무엇이든지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바퀴벌레, 비둘기 깃털, 형형색색의 털실 뭉치들……. 그러나 레오노라가 좋아하는 것은 상자이다. 집안은 갖가지 상자들로 가득 찼지만 레오노라는 더 많은 상자를 갖고 싶어 한다. 어느 날, 레오노라는 언덕 위에서 커다란 상자를 발견한다. 레오노라가 가장 갖고 싶었던 ‘세상에서 제일 큰 상자’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큰 상자를 가져오기 위해서 레오노라는 집안에 모아 놓은 물건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마침내 집안을 모두 비우고 상자를 가지러 갔는데, 이미 상자는 사라진 뒤였다. 텅 빈 집안에서 일어나는 레오노라의 마음의 변화!
이 그림책에서 상자는 인간의 욕구를 상징한다. 욕구는 결핍에서 비롯되고, 사람들은 그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또한 인간의 욕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상자〉는 ‘세상에서 제일 큰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고 있다.
또 다른 그림책은 폴란드 그림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와 한국의 곽영권 글작가가 공동으로 작업한 <비움>이라는 그림책이다. <비움> 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원할수록, 무엇을 바라는 마음은 점점 커질 것이라는 동양의 노자와 서양의 에픽테토스의 깨달음을 깊이 있는 짧은 글과 신선한 그림으로 말해주고자 한다.
‘아름다운 그림책 <비움>은 지금 앉아있는 이 텅 빈 탁자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텅 빈 탁자지만 어딘 가에서는 그림책처럼 아름다운 상상들이 펼쳐지고 있어요. 언제나 화려한 장식품이나 군침이 도는 먹을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원래는 무엇이든 함께 나눌 수 있는 텅 빈 탁자. 하지만 현실은 끝없이 경쟁하고, 이기려고 기를 쓰고, 나누기보다는 가지려고만 하지요. 채우기보다는 비우고, 혼자보다 나누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생각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 작가 백스토리 중에서 -
<비움>의 키워드는 ‘나눔을 위한 비움, 그 즐거운 불편을 말하다.’ 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비움’에 관한 이야기를 참 쉽게 한다. 그러나 일상의 삶 속에서는 ‘비움’보다 ‘채움’에 집중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들에게 <비움>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놓치고 사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묻고 있다.
고양이 레오노라가 세상에서 가장 큰 상자를 가지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우고 얻은 마음의 ‘채움’과 ‘나눔’을 위한 ‘비움’이 곧 또 다른 ‘채움’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이 저녁 마음에 담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고 나면 그 마음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내년에는 내일보다 오늘에 더 집중할 수 있을까?
‘종헌아, 벌써 새벽 한 시다. 그냥 자자!’
김종헌
시인·설악문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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