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가
강현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2007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동창회장이었던 이상갑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음 달 2일, 우리 속고 23회 동기들 졸업 30주년 기념행사가 있는데….”
이렇게 서두를 꺼낸 동창회장은 필자더러 축시(祝詩)를 부탁했다.
“임 선생이 축시를 써서 행사 때 낭송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행사 집행부에서 나왔어.”
시? 필자가 여러 시인들과 친분이 있다 보니 동창들에게 소문이 잘못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음악으로는 제대로 협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인도 아닌데 시는 그렇고…. 관악부 지원 어때?”
“아, 그게 좋겠네! 그럼 1부 의식 행사에서 음악은 강현중 관악부가 맡는 걸로 하고….”
그렇게 해서 속초고 23회 졸업 30주년 행사에 강현중학교 관악부가 참여하게 되었데, 같은 기수 동창회 행사에 관악부(그것도 동창이 지도교사로 있는)가 참여한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필자는 평소 동창회 행사에 얼굴을 내민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때만 되면 동창 모임을 알리는 안내장은 꼬박꼬박 배달되었다. 그게 계속되다 보니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그러던 차에 관악부와 함께 동창회 참여를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30주년 행사는, 재학시절의 은사님들까지 모셔서 치르는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
참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이상갑 회장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동창 중의 한 명이었다. 성품이 참 온화하고 선해서였다. 그리고 이상갑 회장과는 음악적인 인연도 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플루트를 전공하고 있는 딸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악기와 관련하여 필자에게 종종 음악 상담 전화를 하곤 했었다.
그리고 또…. 필자가 거진종고(지금의 거진정보공고)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 이상갑 회장은 거진우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관악부 공연 때 격려금 봉투까지 들고 연주장을 찾아 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이상갑 회장은 강현중학교와 운명적인(?) 관계도 있었다. 이 회장의 출신 중학교가 바로 강현중학교였다.(강현면 강선리가 그의 고향) 아무튼 졸업 30주년 행사에, 이래저래 강현중학교 관악부가 참여할 확실한 구실과 명분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도 관악부 참여를 적극 찬성하셨다. 좋은 현장체험 학습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학창 시절의 은사님들 모시고 하는 행사이니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같군요. 토요일 저녁 행사라 수업에도 지장이 없고….”
임 선생, 섭섭해!
행사는 성황리에 잘 치러졌었다. 강현중학교 관악부가 밴드왜건(Bandwagon) 역할을 제대로 한 행사였었다.
사회를 맡은 문학 소년 출신 김병우 친구의 재치있고 세련된 진행도 아주 큰 몫을 한 행사였다. 속초고 23회는, 22회 최재도 작가와 같은 대문장가는 배출되지 못했다. 하지만, 김승기·윤해근·이강현·이용해 등 문학 소년들은 꽤 많았었다.
음악적으로도 큰 부담이 없었던 행사였다. 1부 행사는 의식 행사여서 개회 팡파르 음악을 시작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곡, 애국가, 묵념곡, 그리고 배경 음악 등등 평소에 연주했던 음악 위주로 하면 되었다.
속초고 교가만 좀 부담이 되었다. 속초고 교가는, 필자가 관악부원들 눈높이에 맞게 직접 편곡을 했었다. 하지만 강현중 관악부원들로서는 처음 접하는 곡이라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습 날짜도 그리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행사 당일 무난하게 연주를 잘 해냈었다.(교가 제창 때, 필자가 무대 마이크 앞에서 좀 과장스럽게 지휘를 하면서 도창(導唱)을 해준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날 축하곡으로는 속초고 교가와 마찬가지로 필자가 편곡한 ‘설악산 메아리’를 연주했었다. 그 곡은 가수 하춘화와 작곡가 고봉산이 부른 경쾌한 폴카(polka) 풍의 가요곡인데, 1970년대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 중의 하나였었다. 그리고 당시 KBS속초방송국 자체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설악의 메아리’ 시그널 음악이기도 했다. 우리 영북 지역민들 중 속초방송국 세대라면 누구나 그 노래에 대한 추억과 향수가 있을 것이다.(요즘에는 그 노래를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그렇게 1부 행사를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이 이어졌었다. 강현중 관악부원들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더구나 저녁 메뉴가 고급 호텔 뷔페였었다.(행사장이 마레몬스호텔 대연회장이었다.) 희희낙락하면서 식사를 하던 시골 중학교 관악부원들의, 그 천진난만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명실상부한 현장체험학습이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저녁 식사까지 모두 마친 후 관악부원들을 인솔하여 행사장을 빠져나갈 때였다. 고3 때 담임 고재양(高在陽) 선생님과 마주쳤다.
“임 선생, 섭섭해! 술도 한 잔 안 따라주고 말이야….”
하지만 전혀 섭섭한 표정과 말투가 아니셨다. 당신의 학급 담임 제자가, 관악부 지도교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 무척 대견스럽다는 표정과 말투였다.
입담 좋으신 김동광 선생님도 한마디 하셨었다.
“오늘 뺀드 소리가 어쩐지 좋다고 했는데 임 선생 뺀드부라서 그랬구만!”
설악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신 김동광 선생님은 체육 선생님이셨는데, 웬만한 만담가보다도 입담이 좋으셨다. 그래서 체육 시간은, 특히 교실 체육 시간은 그야말로 박장대소에 포복절도의 시간이었다. 운동에 소질이 없어서 체육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필자도, 김동광 선생님의 체육 시간만큼은 예외였었다.
아무튼 그 행사 참여 덕분에 필자는, 그동안 동창회에 진 빚을 한꺼번에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 행사에서 필자는 꽤 긴 회고사까지 낭독했었다. 본의 아니게 북 치고 장구 치고, 나팔까지 분 꼴이 되었는데, 그 회고사 원고 집필 및 낭독은 원래 필자 몫이 아니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여 대타로 맡게 된, 아니 맡겨지게 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동창회에 진 빚을 좀 더 확실하게 갚게 되었지만.
속초고 23회 졸업 30주년 행사에서 회고사 낭독을 하고 있는 필자(임수철).
속초고 23회 졸업 30주년 행사장에서 대기 중인 강현중 관악부(김용근 동창 촬영).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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