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신문 덕분에 태이 형을 45년 만에
본고를 시작하기 전에 박태이 선배 얘기를 다시 좀 해야 할 것 같다.
설악신문(6월 20일자)에 태이 형을 ‘속초고 관악부의 전설’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런데…. 태이 형이 일이 있어 한국에 왔다가 그 글을 읽고 전화를 했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태이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게 1977년도였으니 무려 45년 만이었다. 상당히 긴 통화를 했는데, 쌓이고 쌓인 얘기가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학창 시절의 태이 형은 필자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영재였다. 대학 졸업도 학과 수석 아니라 전체 수석이었다. 그것도 무려 일곱 개의 상을 받은 수석 졸업이라고 했다.
필자는 독일로 음악 유학을 간 태이 형이, 치과의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의아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 의문이 풀렸다. 태이 형은 결코 음악을 떠난 적이 없었다. 여전히 뛰어난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다. 태이 형에게 치과 의사직은 일종의 생업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안정적인 생업이 있었기에 세속적인 명리를 초월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태이 형에게 음악 활동은 재능 기부 같은 것이었다.
“음악 재능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정말 귀한 달란트입니다.”
태이 형의 이 말 한마디에서, 그 귀한 음악 달란트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과 사명을 다 하겠다’는 음악 가치관과 태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태이 형은 이제 치과 의사직에서 정년 퇴직을 하고, 앞으로는 본업인 음악에 좀 더 전념할 것이라고 한다.(태이 형은 9월 3일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석원이 형이 바로 그 사건의 주범
박태이 형과 함께 또 꼭 소개해야 할 관악부 선배가 있다. 류석원(柳錫元)이란 선배인데, 태이 형 1년 후배로 태이 형과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석원이 형과 같은 동네에서 1년 남짓 살았었는데, 당시 석원이 형은 속초중 관악부원이었다.
석원이 형은 아주 뛰어난 오케스트라 전문 지휘자이다. 특히 석원이 형의 오케스트라 조련(調鍊)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형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본래 가진 그 이상의 연주력을 발휘하곤 한다. 지휘자로서 이러한 실력과 왕성한 활동 실적이 인정되어, 아주 깐깐한 음악평론가 단체인 ‘6인비평가 그룹’에서 수여하는 ‘오늘의 음악가상(16회)’을 수상했다.(석원이 형의 음악적 명성은 동유럽 지역에서 훨씬 더 높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석원이 형은 원래 클라리넷 연주가였다. 중앙초등학교 관악부를 시작으로 속초중, 그리고 춘천 성수고 관악부에서도 줄곧 클라리넷을 불었다. 원래는 속초고를 다녔었는데, 성수고 음악 선생님과 끈끈한 인연 때문에 성수고로 전학하여 그 학교에서 졸업을 했다고 한다.
석원이 형과 같은 동네(동명동)에 살 때, 그 형이 불던 클라리넷 소리는 지금도 필자의 귓가에 남아 있다. 돌이켜 보니, 그 동네에서 1년밖에 살지 못했던 게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클라리넷과 함께 해왔던 석원이 형이 관동대 2학년이던 1974년이었다. 그해에 음악계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던 어마어마한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된다. 석원이 형이, 동아음악콩쿠르 제14회 대회 목관악기 부문에서 덜컥 1등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무척 가난했던 그 시절에 그 상은, 요즘으로 치면 유명 국제콩쿠르상 못지않은 큰 상이었다.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콩쿠르에서, 작은 지방 도시 소재의 대학생이 1등을 했으니 그게 정말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당시 2등은 한양대생 3등은 서울대생이었는데, 서울의 유명 음대생들도 1·2차 예선, 그리고 본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줄줄이 그 대회에서 탈락을 했었다.)
그 일로 석원이 형은 하루아침에 음악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서는 과우(科友)들한테 무수한 축하 꿀밤 세례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소재의 여러 유명 사립대학으로부터 파격적인 조건의 편입학 제의도 받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우들과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 때문에 차마 관동대를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관동대 음악과를 졸업한 석원이 형은, 군복무를 마치던 해에 속칭 개구리복이라고 했던 제대복을 입은 채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입단 오디션을 보았고, 그 오디션에서 유일한 합격자가 되었다. 그 또한 엄청난 음악 사건이었다.
석원이 형이 오케스트라 전문 지휘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1986년 3월, 석원이 형은 당당하게 공채를 통해 모교인 관동대 교수가 된다. 그렇게 교수가 되어 클라리넷 수업도 하고, 학교 오케스트라도 맡아서 지휘·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휘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재동, 이남수, 김중석 교수 등 당시로써는 내로라하는 여러 유명 지휘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클라리넷 전공으로 이미 중앙대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했지만, 다시 지휘 전공으로 단국대와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음악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졸업하게 된다.
흙수저 출신 음악인의 파란만장 음악 인생
음악을 전공하려면 상당한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런데 석원이 형은 대학 입학 직후까지도 개인용 악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입시도 본인 악기로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석원이 형은, 요즘 시쳇말로 흙수저 중에서도 흙수저였었다.
후기 대학이었던 관동대로 간 것도 사실은 가난 때문이었다. 당시는,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그 대학의 교수나 강사로부터 개인 레슨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레슨비가 서민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고액이었다. 그러니 석원이 형은 레슨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냥 실력 하나만 믿고 입시를 치렀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처음 지원했던 대학의 클라리넷 전공 입학 정원 2명의 합격자가 모두 입학 심사위원 레슨 제자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석원이 형은 입시 들러리를 섰던 것이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심사위원 레슨 제자들조차도 절반만 합격했다고 한다. 클라리넷 전공 입학 정원이 2명인데, 4명의 제자가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기 대학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 석원이 형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너무나 컸었다고 한다. 너무나 불공정한 음악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음악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해(1973년) 신설된 관동대 음악과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전기 대학 낙방 후유증이 얼마나 컸던지 ‘이번에 또 떨어지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입시를 치렀다고 한다.
석원이 형 음악 인생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시련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잘 극복을 해냈다. 석원이 형은 정말 지독한 노력파 음악인이다. 동아음악콩쿠르 1위 입상도 사생결단의 노력 끝에 얻은 결과였다. 학교 음악관 연습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밤샘 연습을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러다가 쓰러져 죽으면 어쩌지?’하고 과우(科友)들이 크게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석원이 형은, 선생님 복은 많았던 것 같다. 초중고 시절, 그의 뛰어난 음악 재능을 알아본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속초중 시절에 김병헌 음악 선생님은 화성학(和聲學)도 개인 지도 주셨다고 한다. 그런 선생님들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격려가 석원이 형에겐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석원이 형은, 속되게 표현해서 개천의 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석원이 형은 자신을 여전히 승천 못한 이무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교수와 시립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라는 안정적이고 명예로운 자리에 있을 때도,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늘 음악적 성장통(成長痛)을 앓았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연주기법에 대한 연구’로 소피아 국립음악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도 취득할 수 있었다.(불가리아 박사는, 국가 공인 박사라서 심사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석원이 형을 낳은 속초가 이제는
석원이 형은 아주 혹독한 득음(得音) 과정을 겪은, 판소리 명창과 같은 음악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다. 그 결과, 음악의 표면만이 아닌, 음악의 이면까지 들을 수 있는 악도인(樂道人)의 경지에까지 오른 것 같다.
석원이 형은 ‘음악의 본질은 우주의 소리’라고 했다. 석원이 형의 이러한 음악 철학은, 도가적(道家的) 예술 철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인데, 그런 석원이 형을 낳은 우리 속초가 이제는, 그 형의 만년 음악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마지막 무대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시립 오케스트라도 없는 속초가? 오히려 그래서 속초는 더욱 전도유망한 오케스트라 음악의 블루오션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합창공연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박태이 지휘자.
류석원 카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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