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은색 트럼펫의 행방이
관악부 지도교사로서 필자의 첫 근무 학교가 양양고라고 했다. 양양고에서는 1988년 3월1일부터 1992년 2월 말까지 4년간을 근무했었다. 그런데 양양고에서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많았었다. 관악부 지도교사로서 완전 초짜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욕만 넘쳤던 것 같다.
양양고에서 근무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악기 구입 문제였다. 양양고 관악부는 오랜 전통도 있고, 연주력도 아주 뛰어났었다. 그런데 필자가 근무하던 당시 악기 사정은 너무 열악했었다. 쓸만한 악기가 몇 대 안 되었다. 대부분이 낡은 악기 아니면 비(非)메이커 악기였다. 하지만 악기는 워낙 고가품이라 학교 자체 예산만으로는 필요한 만큼의 악기 구입이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악기 구입을 위해 서울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중고 메이커 악기 두 대 정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고.(당시만 해도 현금 거래를 했었는데, 그 돈은 동문 체육대회 때 동문들께서 십시일반으로 모아 준 후원금이었다.)
서울에 그 유명한 낙원상가의 악기점에 가 보니 정말 탐나는 악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악기 저 악기 두루두루 눈 쇼핑을 하고 있는데, 악기사 사장님께서 어떤 트럼펫 한 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거 요즘 새로 나온 일제 트럼펫입니다. 학교 관악부용 모델 트럼펫인데, 디자인도 예쁘고 가격도 아주 저렴하게 잘 나왔어요!”
사장님 말씀대로 그 트럼펫은 디자인도 예쁘고 기존의 메이커 트럼펫보다 가격도 저렴했다. 26만원이라고 했다.(요즘 시세로는 대략 60만원 중반대) 그리고 은색(銀色) 도금에다 가볍고, 소리도 기존 메이커 트럼펫보다 편하게 났다.
‘저거 사 가지고 가면 트럼펫 파트 애들이 무척 좋아할 텐데….’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사장님이 추천해 준 그 일제 트럼펫이 눈에 자꾸 어른거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양양고 관악부 트럼펫 파트에는 좀 괜찮은 메이커 트럼펫이라곤 단 한 대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비(非)메이커였다.
사장님은 그 트럼펫을 일단 가져가고 결제는 나중에 해도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필자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학교에다 아무런 얘기도 안 하고 그 트럼펫을 덜컥 가지고 온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관악부 트럼펫 파트 아이들은 좋아서 난리였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황당하다는 표정이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돈 천 원이라도 공식 절차를 밟아서 지출해야 하는 게 공금인데, 몇 십만 원짜리 악기를 그렇게 가져와 버렸으니….
다행히도 학교 살림을 맡고 있는 행정실장님으로부터 눈총과 야단은 피해갈 수 있었다. 당시 행정실장님은 얼굴을 통 볼 수 없었다. 승진 시험 준비를 하느라 자가 연수 중이라고 했다.
그 트럼펫의 외상값은, 교장 선생님과 행정실장님이 모두 바뀌고 난 그다음 해에 결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건 내 있을 때 외상값도 아닌데 왜 이걸 갚아야 하지?”
후임 행정실장님은 이렇게 투덜투덜 대면서 결제를 하셨었다.
악기도 사람의 일생과 비슷
그런 우여곡절 끝에 들여온 새 트럼펫이었는데, 어느 날 연습 시간에 그 트럼펫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일요일 날 집에서 연습하려고 가져갔다가 깜빡하고 안 가져왔다’고 했다.
“그래? 그럼 내일 당장 가져와!”
그런데, 그 트럼펫은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계속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 열흘 정도 지나서야 그 트럼펫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 트럼펫을 분실했었다고 했다. 악기가 새것이고 예뻐서 누가 훔쳐 간 모양이었다. 그래서 관악부원들은 자기네끼리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그 트럼펫과 똑같은 것을 다시 산 것이라고 했다. 그제야 문득 짚이는 게 하나 있었다. 그 무렵에 악장이 찾아와 느닷없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 악기 관리대장에 악기 번호도 적혀 있나요?”
상식적인 얘기지만, 악기에는 ‘시리얼 넘버’라고 하는 각각의 고유 번호가 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것이다. 그 번호를 통해 그 악기의 생산 연도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따라서 중고 악기를 살 때는 그 번호 확인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당시 양양고 관악부 악장(그 악장 이름 공개는 부득이 생략)은 악기의 고유 번호에 대한 기본 상식이 있었던 같다. 그래서 악기의 그 고유 번호가 자신들의 완전 범죄(?)에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악기 관리대장에 악기 고유 번호까지 기재해 놓지는 않는다. 악기 종류와 브랜드명, 그리고 모델명 정도까지만 기재한다.
그 이유는 첫째, 악기 고유 번호가 꽤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라도 고유 번호는 기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만에 하나 어떤 악기를 분실했을 경우를 대비해서이다. 그럴 경우, 분실된 악기 번호까지 같은 악기로 채워놓을 방법이 없고, 또 현실적으로 굳이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분실된 악기와 같은 브랜드, 같은 모델 악기로 다시 채워놓으면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여러 사연이 있었던 그 트럼펫은, 내구연한이 다 되어 이미 오래전에 폐기 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만 남긴 채. 악기의 일생도 사람의 일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양양고 관악부 연주회 모습.(1989년 10월 28일)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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