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 처리할 헌 악기들 덕분에
필자는 25년의 교직 생활 중 21년 동안이나 관악부 지도교사로 근무했었다고 했다. 어느 시인은 자신을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필자를 교사로 키운 것은 8할이 관악부였던 것 같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관악부 지도교사 생활을 하면서 관악부와 관련된 별 희한한 일들도 다 겪었다.
속초고에서 근무할 때 겪은 일이다. 거센 빗속에서 시내 퍼레이드 행사를 치른 적이 있었다. 모 단체로부터 요청받은 외부 행사였는데, 사실은 비 때문에 불참하려던 행사였었다. 그런 날에는 행사를 나가면 안 된다. 비를 맞으면 악기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클라리넷이나 색소폰 같은 목관 악기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 당시 속초고 악기실 한쪽 구석에는 헌 악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강원도민체전이 속초에서 치러졌던 1994년, 그해 속초고 관악부는 속초시청의 지원금으로 악기를 모두 새 악기로 교체했었다. 기존 파트의 악기는 물론이고, 피콜로·바리톤 색소폰·프렌치 호른 등등 전에 없었던 악기들까지 새로 들여왔었다. 130% 수준의 대대적인 악기 구입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시청 지원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었다. 그 지원금도 학교 예산에 비하면 아주 거액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악기를 모두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공개 입찰로 악기를 구매하면서 정말 최상의 조건으로 낙찰이 된 것이다. 예상 구매가보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낮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었는데, 그 바람에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악기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들여올 수 있었던 것이다.(필자의 이판사판식의 과감한 희망 구매 가격 제시와, 두 업체 간의 사생결단적인 입찰 경쟁 덕분이었다.)
그래서 당시 속초고 관악부 악기실은, 새로 구입한 악기들로 인해 여유 공간이 없을 정도였었다. 게다가 기존에 사용하던 헌 악기들까지 쌓여 있어서 더욱더. 그런데 그 헌 악기들 중에는 쓸만한 악기들도 꽤 있었다. 바로 ‘그 악기들을 활용하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 헌 악기들은 행정절차를 밟아 어차피 폐기 처리해야 할 악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날 그 행사는, 그 헌 악기들 덕분에 무사히 잘 치를 수가 있었다.
악보도 없고 곡도 못 외우는데
속초상고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일이다. 그때도 교내 행사가 아닌, 외부 행사 지원을 나가서 겪은 일이다. 행사 장소는 속초공설운동장이었다. 여느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그날도 행사 진행자부터 만났다. 그리고 행사에서 관악부가 연주해야 할 곡들을 하나하나 확인 점검했다.(연주 예정곡들은 행사 주최 실무자와 사전에 미리 조율을 해 놓는다. 그리고 행사 당일 현장에서는 진행자와 최종 확인을 한다.)
그런데…. 연주 예정곡이 아니었던 ‘묵념곡’도 연주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동안 행사 때 여러 번 연주했던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큰 부담없이 관악부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묵념곡도 준비해라, 예정에는 없었지만 연주해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트럼펫 파트 부원들이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묵념곡 오늘 연주 안 한다고 해서 악보도 안 챙겨 왔어요.”
그리고 그 곡 악보도 못 외운다고 했다. 10여 분 후면 행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총알택시를 타고 가도 학교에 있는 그 악보는 가져올 수가 없었다.
‘그 많은 파트 중에 하필이면 트럼펫 파트가?’
관악 합주에서 묵념곡은 트럼펫 파트가 주선율인 곡이다. 따라서 트럼펫 파트가 연주 불가능이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트럼펫 파트가 빠진 묵념곡 연주는 주인공이 빠진 연극 공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난감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10분 내로 트럼펫 악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선지도 없었다. 오선지가 있을 리 만무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운동장 바닥에 놓여 있던 종이박스가 불쑥 눈에 들어왔다. 그 종이박스는 피로 회복제 음료 박스로, 관악부원들을 위해 행사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것이었다.
그 종이박스를 뜯어 뒷면에다 급히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의 필체는 괴발개발 아주 악필(惡筆)이었다. 하지만 속필(速筆)이었다. 그래서 악보를 만드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튼 그 덕분에 그날 그 행사는 무사히 잘 치를 수 있었다.(요즘 같았으면 스마트폰을 활용할 수도 있었겠다.)
큰일 났어요, 3학년 형들이 한 명도
이번에는 거진종고(현재의 거진정보공고)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일이다. 역시 외부 행사였는데, 10월 어느 공휴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사 장소는 거진공설운동장이었다. 여느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필자는 그날도 조금 일찍 출근을 했었다. 그런데 평소 행사 때보다 등교한 관악부원들이 아주 적었다. 그러고 보니 악장(樂長)을 비롯하여 3학년 부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잠시 후 알게 되었는데, 3학년 부원들이 그날 행사에 모두 불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랬다. 2학기 중반이 지나 3학년들이 물러날 때가 슬슬 가까워지자 2학년들이 선배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끼리 알게 모르게 서로 마찰도 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래, 2학년 너희들이 그렇게 잘났으면 관악부 행사도 니네들끼리 잘 치러봐라!’면서 3학년 부원들이 그날 행사에 그렇게 불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지도교사였던 필자는 말할 것도 없고, 2학년 부원들도 무척 당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3학년 선배들이 진짜 그렇게 행사에 불참을 줄 몰랐다고 했다.
그날 행사, 정말 어렵게 치렀었다. 한 곡 한 곡이 연주될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듯한 기분이었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아주 중요한 시합에서 주전 선수들이 모두 빠지고 2군 선수들로 치러야 하는 상황과 비슷했다.
2학년 부원들은 그날 그렇게 겨우겨우 행사를 치러내면서 관악부에서 3학년 선배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아주 절실하게 깨달았었다. 그래서 늦게라도 3학년 선배들이 행사장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3학년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마음이, 지도교사인 필자만큼 더 간절했을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3학년 부원들의 불만이 그런 방식으로 표출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싶다. 그런 방식이 아니었으면 자칫 큰 구타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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