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고 작은 어촌마을의 어느 늦여름, 대낮의 피서객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고즈넉한 바닷가 작은 파도에 고단한 일상의 땀을 씻어낼 때, 멀리 바라보이는 설악산 너머 붉은 노을, 드넓은 동해바다 백사장에 간간이 불어오는 해풍을 타고 동네 어부의 나지막한 지붕 횟집 라디오에서 실바람처럼 퍼져 울리는 어느 소프라노 가수의 ‘Summer time’ 노랫소리…. 이 편안하고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불현듯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 우리 고향 속초와 같은 자연환경을 배경 삼아 매년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 도시가 떠올랐다.
인구 2만 명의 이 작은 도시에, 매년 25만 명의 관광객이 오페라 페스티벌과 이곳 자연환경을 즐기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온다. 브레겐츠의 노을이 물든 보덴호수, 그리고 간간이 불어오는 여름날 미풍에 호수 위 대형 분수 쇼, 성악가들의 열창….
영국 올드버러, 인구 2700여 명의 도시 외진 바닷가마을 항구에서 벌어지는 오페라 클래식 음악축제, 바닷가의 그림 같은 집들과 풍성한 이국의 꽃들로 장식되어있는 거리에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도시….
어느 날 문득, 수십 년 동안 숨 가쁘게 뛰어다닌 해외, 국내 타 지역의 오페라극장을 뒤로하고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은, 우리도 이들처럼 고향 속초가 지닌 아름다운 자연들, 해질녘, 잔잔한 영랑호수 너머 펼쳐지는 설악산 자락의 석양, 바람결에 스치는 바다 냄새… 그 자연 속에서, 고향의 바닷가 어촌마을에서 경험해보지 못하였던, 오페라가 벌어지는 세계적인 문화예술 도시를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풍 지는 늦가을 시월의 마지막 밤, 우리도 한번 해볼 수 있다는 소소한 오기를 부려 보았다. 과거 함께 공연했던 예술의전당 공연 인맥과 사비를 들여서 이곳 고향 속초에서 처음 오페라 ‘카르멘’을 무대에 올렸을 때, 오페라가 낯선 문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공연을 관람한 속초 관객들의 환호와 열렬한 반응으로, 한동안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들뜬 자부심과 설렘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관객들의 힘으로 공연 관광객을 끌어모으기 위해, 그 후 몇 년을 정기적으로 ‘시월의 마지막 오페라의 밤’ 행사를 정착시키고자 시·도 관공서 문을 두드리며 고군분투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과 여러 난관에 부딪혀 계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문화예술 활동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 도시는, 시민들의 삶과 문화예술이 함께 발전하면서 도시가 더욱 번창해 나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 16세기 역사상 최초로 오페라가 탄생했던 도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등 수많은 문화예술 천재를 낳았던 이탈리아 작은 도시 피렌체가, 흑사병으로 수많은 인구가 목숨을 잃고 초토화가 되는 상황에서도 도시가 다시 살아나서 세계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피렌체의 무역, 금융 자본만이 아니라 돈 많은 주변 국가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도시의 문화, 예술에 대한 정치, 자본가들의 지원이 남다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전 세계 걸출한 음악, 미술, 문학계 예술인들, 관광객들, 대상인들이 몰려들어서 그 도시가 최고로 번창할 수 있었다.
과거, 오직 생존을 위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고향의 자연환경 속에서 황량하게 보냈던 중학교 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속초여중 오케스트라 클래식 음악 활동을 통해서 어른들의 생존의 현장에서 몰래 나만의 ‘희망’이라는 실체를 잡고 원했던 꿈을 이뤄나갔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미래 세대들, 현실 밖의 또 다른 꿈을 꾸는 지역의 청소년들에게도, 다양한 문화예술 환경 속에서 폭넓은 삶의 가치를 경험하면서, 그들의 미래의 꿈이 보장되는 도시로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먹고 사느라고 열심히 일하는 지역 사람들에게 공연예술은 더 이상 문화적인 사치와 향유가 아닌, 그것은 우리의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영혼이고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일상이 되도록 지역 예술인들의 예술적 능력과 밤을 지새우며 불태웠던 그들의 예술혼에, 희망과 기운을 모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우리 도시의 천혜의 자연에서 숨을 쉬고 싶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그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문화예술 관광도시로 발전시켜 국내뿐 아니라 세계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관광도시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도시의 발전을 위해 쉼 없이 달려왔던 세계가 코로나로 수많은 생명을 잃은 후 이제 숨 고르기를 하며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을 위해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때이다. 오늘도 우리 도시로 몰려오는 관광객들에게, 빈틈없이 들어서는 고층건물과 상권으로 가로막힌 자연만이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문화예술을 선사할 수 있도록 관광도시로서 제도적 뒷바침이 마련되어, 예술인들이 예술하기 좋은 최고의 도시가 될 수는 없을까. 십여 년 전, 설악산 단풍 지는 시월에 오페라 하는 바닷가 관광도시를 꿈꾸며, 고향에서 오페라를 선보였을 때, 우리에게도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이상의 예술 자원을 보았던 것처럼, 호수 위에서, 바다에서, 항구에서, 저녁놀이 깔린 길거리에도 오페라와 클래식 연주가 넘쳐나는 도시, 분단의 아픔이 살아 있는 실향민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문화예술 관광 도시가 될 수는 없을까.
동서고속화철도, 양양국제공항, 크루즈, 기타 물류 도시 활성화로 열린 길을 통해서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자연환경을 지닌 속초는 지역민의 편의와 문화 예술관광 인프라까지 갖춘 낭만 도시가 된다면 대한민국 최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될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고달픈 삶의 위로가 되어 주고 그 도시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영혼인 것도 확실하지만 이젠 예술이 도시의 허기를 채워주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손문숙
오페라연출가·강원M오페라단장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도시의 오페라페스티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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