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악기들을 몽땅 다
번아웃 증후군 상태에서 방학하는 날까지 겨우겨우 버텼던 것 같다. 방학을 하자마자 건강 관리에 집중했다. 청대산을 오르내리며 체력도 키웠다.
그다음 해인 2000년에는 거진공고와 거진여자상업고가 통합이 되었다. 학교 이름도 거진종합고로 바뀌었다. 관악부로써는 아주 좋은 일이었다. 관악부 인력풀이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통합에 따른 많은 예산이 지원되었는데, 그 지원금 중 일부로 노후 악기들을 완전히 다 교체했다. 그리고 부족한 악기는 새로 들여왔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필자가 원했던 만큼의 관악부 예산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다 결재를 해주셨다.
당시 교장이셨던 유근재 선생님은 필자와 그 학교 전입 동기셨다. 성품이 꽤 꼬장꼬장하고 깐깐하신 분이셨다. 교감 선생님조차도 그 교장 선생님을 어려워하셨을 정도였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관악부에 대해서만큼은 너무나 관대하셨다. 학교 댄싱팀과 락밴드에 대해서도 그러셨다. 그 정도로 학생들 예능 활동을 잘 이해하시며 장려하셨다.
관악부 지도 교사인 필자에 대해서도 각별하게 총애를 하셨었다. 그렇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시면서도, 좀 더 넉넉한 지원을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늘 말씀하셨었다.
천하의 호인이셨던 최규선 교감 선생님은 행정적으로 지원을 해주셨었다. 관악부가 외부 행사 지원을 나가게 되면, 당신이 손수 자필로 출장 명령서를 작성하셔서 필자에게 사인만 하라고 하셨다. 그런 방식으로 출장비를 알뜰하게 챙겨주시곤 하셨다.
악보와 테크닉을 초월했던 그 감동의 연주
2001년 5월 15일, 마침내 관악부 단독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다. 지도 교사로서 필자가 그토록 원해왔던 연주회였다. 예상보다 빨리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학교의 파격적인 재정 지원과 관악부원들의 열정 덕분이었다.
그날은 스승의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전에는 스승의 날 행사를 치렀었다. 스승의 날 행사에서 선생님들을 위해 연주했던 곡은 ‘십자훈장 서곡’이었다. 연주시간이 7분 남짓 되는 꽤 긴 곡이었다. 그 곡은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고난도의 곡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정서를 담고 있는 곡이라 정서적 표현이 무척 어려운 곡이었다.
느리고, 아주 장중하면서도 비장한 정서를 담고 있는 서두 부분 연주가 시작되었다. 관악부원들의 연주 태도가 평소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숙연했다. 그래서인지 불과 서너 마디 정도밖에 연주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뜨거운 감동이 가슴속을 깊이 파고 들어왔다. 악보를 초월한, 관악부원 한명 한명 모두의 마음이 담긴 뜨거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그것은 지휘봉만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휘봉으로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하면서 더 이상 사인을 보낼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연주하는 대로 그냥 따라가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 연주는, 관악부원들 평소 실력의 200%를 발휘한 명연주였다. 동료 선생님들도 그날 그 연주에 대해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하셨다.
“아니, 우리 학교 관악부 애들이 언제 저렇게?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아쉽게도, 필자는 그날 이후 그런 감동적인 연주는 두 번 다시 체험해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환골탈태한 거진종고 관악부는, 필자의 후임 지도 교사 때는 전국 대회에서 입상까지 하게 된다. 후임 임정호 선생님은 필자가 다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좀 더 세세하게 보완하여 관악부의 수준을 한 단계 더 올려놓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 수가 워낙 많이 줄어서 관악부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2022년 현재 전교생이 불과 21명) 그동안 거진종고 관악부는 학교만의 관악부가 아니었다. 거진읍민 모두의 관악부이기도 했었다. 농어촌 지역 학교의 학생 감소는 여러모로 참 심각하다.
2001년 5월 15일 연 제1회 거진종고 관악부 연주회 안내장.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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