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곳에서 산다.” 외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속초에서 사는 우리들은 이제 익숙해져서인지 그냥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게도 되는 말이다. 올해 휴가철도 다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궂은 날씨가 많았던 올여름에도 많은 이들이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휴가를 보내러 왔다.
살면서 좋은 곳에서 산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가끔씩 아내와 영랑호 주변 습지를 산책할 때 특히 그런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인공미 가득한 청초호 주변 공원보다는 습지가 포함된 자연 친화적으로 조성된 영랑호 주변 공원이 더 좋게 느껴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영랑호 주변을 산책하다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사시사철 얇은 옷을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각양각색의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러닝 하이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를 ‘러닝 하이(running high)’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말은 주변 환경의 자극이 있는 상태로 운동을 할 때 발생하는 신체적 스트레스로 얻게 되는 행복감을 말하며, 이때의 의식 상태는 헤로인이나 모르핀과 같은 마약을 투여했을 때와 유사하고 때로는 오르가즘에 비교되기도 한다. ‘노르웨이의 숲’ 등의 소설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자신의 묘비명에 소설가이자 러너(runner)로 기록해 주길 바랐다고 하니 러닝 하이의 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러닝 하이’ 하면 떠오르는 아주 오래된 추억이 하나 있다. 삼십여 년 전, 필자가 군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해서 일정에 따른 훈련을 감내해 나가고 있던 중, 완전군장 구보가 있었던 날이었다. 낙오자가 왕왕 나오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는지 중대장이 구보를 시작하기 전에 완전군장을 하고 모여 있는 훈련병들 앞에서 훈시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그의 훈시는 “사람은, ‘죽어도 더 이상은 못 뛰어’라고 생각하는 시점부터 2km는 더 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구보 중 그가 만들었을 법한 구호. 중대를 반으로 나눠서 한 편에서 “아들 낳지 말게!” 하면 다른 편에서 “자네 말이 맞네!”라고 외치면서 구보했었던 기억들. 재밌는 구호 덕분이었는지 중대장의 훈시 때문이었는지 우리 중대에서 낙오자는 없었고 무사히 완전군장 구보를 마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중대장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어쩌면 러닝 하이의 또 다른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3 수험생인 아들이, 대입에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 시험인 3학년 1학기말 시험을 치렀다. 중2병을 제법 진하게 겪느라 좀 뒤늦게 공부에 매진하게 된 아들과 기말고사 마지막 과목의 시험을 끝낸 날 저녁 식사를 함께 했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그가 했던 말이 “아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것 같아요.”였다. 그동안 새벽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공부 스케줄을 만들고 지켜오면서 그가 기울여 온 노력과 정성을 지켜 봐왔고 알기에 아들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하고 좋은 경험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러닝 하이, 세상 어떤 일이든 임계치까지 다다르다 보면 오히려 쾌감이 느껴지고 세상에 못 해낼 일이 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또한 생각건대, 우리가 무엇을 원한다고 한다면 온 하늘이 새의 길이듯 새로운 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매진해 보는 것, 임계점까지 가보는 것. 러닝 하이를 생각해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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