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할 겨를도 없이
21년간 관악부 지도 교사 생활을 하면서 모두 여섯 학교 관악부를 거쳤다. 이 여섯 학교의 관악부를 통해 쌓은 경험과 추억들 모두가 교학상장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이 여섯 학교 관악부 중에서도 필자에게는 좀 더 각별한 관악부가 있다.
이제는 꽤 먼 과거가 된 1999년…. 그 1999년은 필자의 인생 중 가장 힘든 한해였었다. 필자에게는 한 명뿐이었던 형이, 그해 4월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었다. 향년 49세…. 하지만 마음 놓고 애도를 할 수도 없었다. 형이 못다 한 장남의 역할을 차남인 필자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 해 2학기에 속초상업고에서 거진공업고(지금의 거진정보공고)로 발령이 났다. 속초 지역 근무 만기가 한 학기밖에 남지 않았던 때였다. 그래서 어차피 속초 지역 외의 학교로 옮겨야 했다. 따라서 그 발령은 시기적으로는 아주 적절했다. 하지만 낯선 새 학교에서 제대로 적응할지 걱정이 되었다. 사별한 형 생각에서 좀처럼 헤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맏아들을 떠나보내고 정말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직장 생활을 잘해야 했다.
삑사리로 멈춰버린 트럼펫 소리
부임 첫날이었다. 학교체육관에서 부임식 행사가 있었다. 거진공고는 먼저 근무했던 속초상고에 비하면 학생 수가 정말 적었다. 뒤쪽 스탠드에 자리 잡은 관악부도 인원이 10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관악부부터 둘러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그날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악장이 중심이 되어 저희들끼리 알아서 행사를 잘 치러내겠거니 했다.
이윽고 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사회자 교무부장 선생님의 진행 멘트에 맞추어 관악부 연주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연주가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주선율을 맡고 있는, 트럼펫 파트 소리가 아주 불안 불안했다. 소리가 너무 무거웠다. 높은음에서 분명히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네 번째 마디 부분의, 한 옥타브 위 솔(sol) 음에서 속칭 ‘삑사리’라고 하는 음 이탈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악부는 그 부분부터 다시 연주를 했다. 하지만 트럼펫 파트는 그 부분에서 또다시 사고를 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연주를 시도했는데, 그때부터는 아예 소리가 안 났다. 바람 새는 소리만 픽픽났다. 마치, 고물 자동차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가 엔진이 덜컥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교무부장 선생님이, 관악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만 때려치워!”
그러자 트럼펫 파트 주자는, 아주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으면서 악기를 무릎 위로 슬며시 내려놓았다. 결국 그날 그 부임식 행사는 관악부 주악(奏樂) 없이 치러졌다.
음표가 실종된 계이름 악보
그렇게 민망한 그 행사를 마치고 나서 관악부와 첫 미팅을 했다. 그런데 거진공고 관악부는 악보라는 게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이름이 빼곡히 적힌 A4 규격의 종이가 그들만의 전통적인 악보였다. 그런데 계이름이 적힌 그 종이에는 곡마다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1번에서부터 모두 10번까지 있었는데, 행사 때 그 번호순으로 연주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계이름 악보는 음높이만 있고 음의 길이는 없는, 아주 불완전한 형태의 악보였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조표가 있는 곡을 연주할 때였다. 예를 들어 바(F)장조의 곡인 경우에는, 내림표(플랫: b)가 붙는 ‘나’음(다장조의 ‘시’에 해당)은 반음 내려서 연주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악보에는 조표 구별이 없이 1번부터 10번 곡까지 모두 다(C)장조 식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표가 걸리는 음들은 모두 반음씩 틀리게 연주를 했다.
지휘자도 따로 없었다. 악장이 ‘셋, 넷!’하고 입으로 사인을 내면 연주가 시작된다고 했다. 곡의 박자와 무관하게 한결같이 시작 사인이 ‘셋넷’이었다.
악기 상태도 아주 심각했다. 악기의 가짓수는 꽤 많았다. 그런데 거의가 노후된 악기였다. 관악부가 1981년에 창단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악기 교체를 거의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20년이 다 된 악기들이었다.(학교 악기는 워낙 험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10년만 되어도 완전 고물 악기이다.)
심벌즈는 짝도 맞지 않았다. 신발처럼 서로 사이즈가 맞아야 하는데, 한 짝은 크고 한 짝은 작았다. 앞으로 악기 구입 예산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1학년 부원이 겨우 두 명밖에 없었다.(트럼펫: 최현우, 트럼본: 라주희) 원래는 여러 명이 있었는데, 선배 형들이 워낙 무서워서 중간에 대부분 탈퇴를 했다고 했다. 관악부에서는 악기보다 부원들이 더 중요한 자원이다. 악기는 빌려올 수도 있다. 하지만 관악부원인 사람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튼 관악부 지도 교사로서 해야 할 일들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번아웃 증후군까지 겪으면서
그런데 며칠 동안 관악부와 함께 지내보니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부원들이 학업에는 의욕이 별로 없었지만, 관악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주 뜨거운 것 같았다. 그런 만큼 지도 교사의 가르침에 대한 열망 또한 대단했다. 가르쳐주는 대로 쭉쭉 받아들였다. 그동안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그들이 얼마나 지도 교사의 가르침을 간절히 갈망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관악부원들의 그런 뜨거운 갈망은, 형과 사별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던 필자에게 아주 매서운 교육적 죽비(竹篦)가 되었다.
우선 악보 읽는 법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가르치고 또 가르쳐도 끝이 없을 정도였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퇴근이 늦을 때도 많았다. 그 바람에 카풀팀 선생님들도 함께 늦퇴근을 하시곤 했는데, 다들 잘 이해를 해주셨다.
미래의 음악 자원인 1학년 부원들도 여러 명 선발을 했다. 더 이상 선배들 무서워하지 말고 관악부에 들어오라고 종용했다.
“선생님이 다 책임질 테니 마음 놓고 관악부에 들어오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기대 이상으로 여러 명이 입단을 했다.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신입 부원들이 한결같이 근면 성실하고 학업 성적도 우수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렇게 입단하여 졸업할 때까지 필자와 고락을 같이 했던 부원들은 다음과 같다.(관련 사진 참조)
▲클라리넷(송승현), ▲알토색소폰(신명재), ▲테너색소폰(김구산), ▲트럼펫(김덕명, 조일환, 최현우), ▲트럼본(라주희), ▲타악기(신상선, 임우건, 최관희, 허성탄)
기존에 남아 있었던 라주희와 최현우를 포함 모두 11명이었는데, 그 후 이들이 핵심이 되어 거진공고 관악부는 완전히 환골탈태하게 된다.
그렇게 관악부 재건에 온통 열정을 쏟으면서, 사별한 형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에서 그나마 좀 벗어날 수 있었다. 관악부원들의 일취월장하는 걸 보면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 같았다.
그런데…. 부임한 지 2개월 남짓 되었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온몸이 부서져라 지도를 하고 있었다. 연습곡은 ‘신아리랑 행진곡’이었다. 그날따라 필자가 원하는 만큼 연주가 잘되지 않았다. 몇 번씩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부분은 이렇게 하라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안 돼?”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서였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쭈욱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리도 풀리면서 서 있을 힘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바로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40대 한국 남성들의 돌연사가 왜 그리 많은지 그때 실감했었다. 40대의 신체 조건으로 30대만큼의 과도한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었다. 파트 지도 강사 한 명 없이, 오로지 혼자서 관악부의 그 많은 모든 일들을 다 하다 보니 에너지가 그렇게 다 바닥이 났던 것이다.
<계속>
필자가 거진공업고(지금의 거진정보공고) 교사 시절 함께 한 관악부원들.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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