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고 관악부 전성기 핵심 인물 태이 형
지도교사가 없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속초고 관악부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필자가 기억하기에는 1971년이었던 것 같다. 1971년이면 속초고 18회 선배들이 3학년이었던 때였는데, 그 당시 악장(樂長)이 박태이 선배였다.
학창 시절, 필자에게 박태이(朴台二) 형은 음악적으로 넘사벽 같은 존재였었다. 그 정도로 태이 형은 뛰어난 음악 천재였었다.
필자가 태이 형을 최초로 본 것은 속초고 관악부 연습실에서였다. ‘연습실’이라고 하면 시설이 잘 갖추어진 전용 공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나 가난했던 그 시절에, 속초라는 작은 도시의 공립학교에 전용 연습실이 있을 리 만무. 방과 후 빈 교실이 바로 연습실이었다. 그곳에서 속초고 관악부 형들이 연습을 하고 있던 모습을 밖에서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그 교실은 1층이었다. 그리고 창문을 모두 열어 놓은 상태였었다. 그래서 연습 장면 하나하나를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때는 속초고가 설악중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때였다.(설악중은 1967년 속초고 병설중학교로 개교) 그런데 필자네 집이 학교 근처였었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그 과정에서 속초고 관악부의 연습 광경과 함께 태이 형도 보게 된 것이다.
태이 형이 관악부 지휘뿐만 아니라 지도까지
그런데 그날 태이 형에 대한 그 기억이 유독 강렬했던 것은, 태이 형은 악기를 불지 않고 지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필자는 관악부 지휘를 학생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태이 형은 관악부 지휘뿐만 아니라 지도까지 하고 있었다. 지휘 도중에 자주 연주를 끊고는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하면서 아주 세세한 지도를 했다. 웬만한 음악 선생님보다도 더 잘 지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날 그 연습 때 연주했던 여러 곡 중에 ‘워싱턴 포스트 마치’라는 행진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곡의 제목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곡의 트럼본 파트 가락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곡은 시각적으로도 트럼본 파트가 아주 돋보였다. 트럼본의 슬라이드가 앞뒤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부분 때문이었다. 어린 필자에게 그 모습은, 경량급 권투 선수의 주먹보다도 빠른 것처럼 보였었다.
그처럼 태이 형은 관악부 악장으로서 무척 실력이 뛰어났었다. 그리고 관악부 부원들 실력 또한 대단했었다. 부원들 중 다수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관악부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습량도 많았었다. 그 시절은 지금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보충 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었다.
1970년대 초 천하무적의 속초고 관악부
그런 실력을 갖춘 속초고 관악부였기에, 1971년 영북지역 합창·합주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었다. 이미 예상된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지도교사가 없는 관악부끼리만 경쟁하는 전국 대회가 있었다면, 그 대회에서도 1등을 했었을 것이다.(당시 중1이었던 필자는, 속초중 합창부 소프라노 파트 부원으로 그 대회에 참가를 했었다.)
그날따라 태이 형은 더더욱 열정적으로 지휘를 했었다. 허리 아래의 하체까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지휘를 했었다.
그 대회 합주부문 지정곡은 ‘다뉴브강의 잔물결’이었다. 상당히 긴 곡이었다. 그 긴 곡을 시종일관 그렇게 온몸으로 지휘를 했던 것이다. 심사위원이, ‘하체까지 심하게 움직이면서 지휘하는 건 좀 과장스럽지 않으냐’는 지적까지 했을 정도였다. 50년도 더 된 오래전의 일이지만, 태이 형이 그 대회에서 그처럼 열정적으로 지휘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 것 같다.
독일로 음악 유학, 그런데
태이 형은 트럼펫 파트였었다. 하지만 트럼펫 외에도 클라리넷, 바이올린, 기타 등 웬만한 악기들은 다 잘 다루었다. 그리고 지휘는 물론이고, 작곡과 편곡 실력도 뛰어났으며, 노래도 잘 불렀다.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에도 뛰어나서 대학 1학년 무렵쯤에 이미 관현악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춤추는 호수’라는 제목의 곡이었는데, 영랑호를 소재로 쓴 작품이라고 했다. 그 곡은 당시 태이 형의 지휘로 속초여중 관현악부에 의해 연주가 되었다. 필자는 그 연주를 두 번 정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태이 형은 작곡 전공으로 대학엘 갔다.(차석으로 합격하여 수석으로 졸업) 그런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지 태이 형은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좀 교만하게 보이기도 했었다.
아무튼 태이 형은 음악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태이 형이었기에, 학생 신분이었지만 기성 음악인보다 훨씬 더 유명 인물이었다. 당시 속초에서 태이 형을 모른다고 하면, 속된 말로 간첩이었다.
태이 형 부친 또한 유명 인물이셨다. 박익훈 교장 선생님이 바로 태이 형의 부친이셨다.
필자는 그런 태이 형을 음악 멘토로 늘 열망했었다. 하지만 필자에게 태이 형은 너무나 높고 먼 산이었다. 그래서 당시 필자는, 직접 대면은 못 하고 편지를 통해 음악 지도를 두세 번 정도 받았었다. 그게 전부였고 태이 형과 더 이상의 음악 인연은 이어지지 못했다. 대인 친화력이 부족했던 필자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태이 형은 음악적으로 늘 바빴었다. 필자 같은 무명 음악도(音樂徒)를 살뜰하게 보살펴줄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1974년, 속초고 관악부가 재창단 되었을 때도 그랬다. 태이 형은 여름방학 때 한번, 그리고 겨울방학 때 한번 이렇게 딱 두 번만 학교를 방문한 게 전부였다. 너무 야속하고 아쉬웠었다. 후배 관악부원으로서 배우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반면에 태이 형 1년 후배였던 허승훈 형은, 학교를 자주 방문해서 후배들을 챙겨주었다. 꿩 대신 닭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한 것이다.(트럼펫 파트였던 허승훈 형 또한 재능이 뛰어났었고, 태이 형 후임 악장으로 1970년대 초 속초고 관악부 전성 시절을 이끈 핵심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태이 형은 대학 졸업 후 독일로 음악 유학을 갔다. 그리고 독일에 정착을 하였다. 그런데…. 치과의사가 되었다. 치과의사 박태이? 음악인이 아닌 치과의사로서 태이 형의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정말 알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1971년 영북지역 합창·합주경연대회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속초고 18회 박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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