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곳저곳 모임이 많아졌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아들 학교 운영위원장, 딸 학교 학부모회장, 환경운동본부, 주민자치위원, 새 강원포럼, 충청도민회, 목욕협회 등등…. 각종 모임은 18개나 되었고 명함에는 앞뒤가 부족했다. 어디에나 회장, 총무였고 내가 없으면 모임이 안 되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소같이 일만 하던 아내가 병이 나기 시작했다. 매사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우리는 싸움이 잦아졌고 대화가 멀어졌다. 눈만 마주치면 어떻게 하면 손님을 더 유치할까 목욕탕 이야기로 끊이지 않게 고민하던 부부가 거리가 생긴 것이다.
사사건건 시비 거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아마도 아내가 나와 이혼하기를 원하는 줄 알았다. 어디가나 남편이 회장으로 칭송받는 것이 자랑스러울 텐데, 무엇이 불만인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결심하였다. 딸 아이가 고 3이니 대학만 가면 이혼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더 밖으로 돌기 시작했고, 아내와 나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아이들과 손님이 최우선이었던 아내에게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고 손님이 있어도 나와 싸우기 일쑤였다.
딸아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내 생각을 결정짓고 이혼하리라 생각할 즈음, 교회에 다니시는 장로님 한 분이 오셨다. 목욕을 하러 오신 건데 다짜고짜 날보고 교회에 다니자고 하셨다. 아마도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셨던 것 같았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내 믿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교회에 다니며 여러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우리는 열심히 믿음생활을 했고 나는 교회에서 설립한 아버지학교에 들어가 아버지의 역할과 가장의 권위에 대해 배우고 다른 분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 학교에 들어가니 첫 번째 슬로건이 ‘아버지와의 대를 끊자’였다.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다. 설사 부모에게 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 학교라는 곳에서 어떻게 아버지와의 대를 끊어 버리라고 감히 말을 하는가?
그러나 5주간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이해할 수가 있었다. 지나치게 권위만을 내세우며 자식과 아내에게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했던 아버지 시대와의 대물림을 끊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형제는 수족이요, 아내는 의복이니, 의복 같은 아내로 인해 형제와 척이 지거나 의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어린나이에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으며 배웠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효자아들(?)인 나는 그래서 아내가 시집식구 이야기 하는 것은 무조건 싫어했고 시집식구 흉을 보는 날은 다툼이 일어났었다. 아버지학교에서 숙제를 내준 일이 있었다. 아내가 좋은 이유 20가지를 써오라는 것이었는데, 20년이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아온 아내인데 좋은 이유 20가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두세 개 써놓고 더 쓰지 못하는 나를 보고 내 스스로가 어이없고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날 문득 보니 내 아들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가 나의 아버지와 대물림을 끊지 않으면 아들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란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편지 말미에 너는 나의 잘못된 모습을 닮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과 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형제는 수족이니 형제와의 의가 갈라지는 일이 없어야 함은 맞지만, 네가 훗날 결혼할 네 아내는 네 자식을 낳아 사랑으로 키우는 귀한 사람이니 네 목숨보다도 더 아끼며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 주었다. 대학 3학년이었던 아들은 편지를 다 읽고는 나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이해하고 알아들었다는 표시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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