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연말 두 가지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선거방송토론위원회의 속초 후보자토론사회자 제안을 사양했다. 이번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찌감치 속초시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섭외요청 전화가 왔었다. 2008년부터 줄곧 진행해오던 익숙한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다른 진행자에게 양보하고 내려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심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안 때문이다. 방송 원고를 제대로 보려면 돋보기를 써야 하는데, 생방송 카메라를 바라보면 뿌옇게 보이는 것이 문제다. 쓰고 벗고를 반복할 수도 없고, 일상착용 다초점은 주말농장에서는 몹시 거추장스럽다. 젊어서는 시력 2.0에 줌 기능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어느덧 창문이 흐려진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에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고 되어 있다.
나이가 들면 치아가 흔들리니 맷돌질이 적고, 시력이 떨어지니 창들로 어두워지고, 얼굴에는 검버섯 살구나무에 꽃이 피며, 기력이 없으니 메뚜기도 짐이 되는 것이 세월이 지난 인생의 모습이다. 그래서 먼저 선포하기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돌아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크신 은혜요 감사뿐이라. 오랜 시간 선거 생방송을 별다른 과오 없이 진행했으니 말이다. 여기에도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사회자의 생명은 공정진행이다. 사회자가 쓸데없이 자기주장이나 즉흥적 애드립(ad lib)을 첨가하면 반드시 방송사고로 이어진다. 선거철마다 사회자 실수로 여러 선거구에서 방송사고가 발생한다.
다른 하나는 연말에 시무장로를 사임했다. 아직 장로은퇴까지 7년이나 남았지만 조기은퇴를 결심했다. 처음 생각은 원로목사추대식 때 함께 은퇴하려고 했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후임 교역자의 목회에 부담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칫 꼰대 짓이 굳어지면 습관성 꼴통장로가 되기 십상이다. 교회마다 꼴통장로가 걸림돌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캠퍼스를 오가는 것이 부담되었다. 운전시간만 왕복 5시간에 온종일 강의를 하면 성실한 시무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20년 넘게 장로를 했으니 열정이 식기 전에 이참에 후배 항존 직분자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2021년 12월 19일, 마지막 주일예배기도 전에 원로목사님께 인사드렸더니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격려말씀을 해주셨다. 바로 ‘낙화’ 시구절의 인용이다.
봄이 오나 했는데 벌써 벚꽃 낙화가 비처럼 내린다. 인생도 춘하추동이다. 신조어로 ‘낄끼빠빠’가 있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준말이다. 지혜로운 처세술의 대원칙이다. 이것을 모르는 젊은이는 눈치 없는 푼수로 낙인찍히고, 나이 들어 모르면 노추(老醜)가 되고 만다. 이상적 출구전략이 ‘낄끼빠빠’다. 은퇴가 리타이어라는 열정다짐과는 별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청대산에 올라가 보자. 정상에 올라서면 곧바로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 정상에 머무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경치가 아무리 좋더라도 산꼭대기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등산객이 깨닫는 진리이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내려놓았더니 감사하게도 교회당회와 공동의회에서 부족한 사람에게 원로장로 추대를 의결해주셨다.
끝으로 이형기 시인의 ‘낙화’ 일부를 소개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생략).
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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