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산업사회를 실제로 뒷받침해 온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이것에 기반한 군사·경제력이었다. 이른바 합리화·근대화로 널리 알려진 이 같은 발전의 과정에서 부(富)는 체계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었고, 그와 동시에 위험은 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우연적으로 발생되는 난관에서 이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변모하였다.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로 이전되었던 것이다. 즉 합리적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오늘날 사회는 놀랍게도 위험사회로 변한 것이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는 “현대의 위험은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의 안전과 위험문제는 산업혁명 이래 근대적 합리화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향후의 발전 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요구한다. 그가 말하는 위험사회의 특징을 보면, 첫째, 위험의 평균화이다. “빈곤(결핍)에는 위계서열이 있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것이다. 부자든 빈자든 막론하는 탈계급적이고 불확정된 위험으로 공포가 더 크며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기가 어려워진다. 대기오염과 교통소음으로부터 도피하여 특권적인 주거지로 옮겨 살 수는 있다. 그러나 물과 토양의 오염은 도처에서 일어나 화학적 피해와 원자구름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해진다. 위험은 그것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객관적으로 평등화의 효과를 갖는다. 바로 여기에 위험이 갖는 새로운 정치적 힘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험사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며, 그 사회의 갈등은 계급 갈등이 아니다. 과거는 “부는 위에서 축적되고, 위험은 아래에서 축적”되었다. 그러나 원자력과 화학물질로부터 오는 위험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행동했던 범주들을 파기한다. 부자들은 물론 권세 있는 자들 역시 위험 앞에서는 결코 안전치 못하다. 문명의 위협이라는 지붕 아래 가해자와 피해자가 머지않아 일체가 된다.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고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시대였으나, 현대는 만인이 저절로 평등한 사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해와 위험의 만민평등 사회이기 때문에 이 평등이 긍정적 의미의 평등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은 유기농 식품을 먹고 비교적 안전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등 상위계층일수록 위험이 줄어들고 하위 계층일수록 위험이 증대하는 계층 상대적인 면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의 상대성을 논하기에는 이미 위험의 심각성이 너무 악화되었다. 그리고 근대 사회가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의 마찰과 분리를 부추겼다면, 현대사회는 위험의 '동등함'으로 인해 구성원들의 단결과 유대를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주의화
둘째, 위험의 전지구화이다.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일상의 빵’을 위한 투쟁은 다른 모든 것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기본 문제로서의 긴박성을 잃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굶주림이 아니라 ‘비만’이 됨과 동시에 부의 원천이 커 가는 ‘유해한 부수효과들’로 ‘오염’된다는 지식이 확산되고 있다. 위험은 어느 시대나 존재해왔지만, 작금의 위험의 성격은 산업사회 시기에서 나타났던 위험과는 판이하게 성격을 달리한다. 핵분열이나 방사성 폐기물의 축적처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위험은 개인적 위험이 아니라 지구적 위난이다. 오늘날의 삼림파괴는 산업화의 필연적 결과로서 대단히 상이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낳으면서 지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원전사고처럼 원자로의 붕괴로 인해서 생기는 생태학적 재앙은 피해 규모가 엄청나며 피해의 정확한 산정이 불가능하고 그 효과도 매우 장기적이기 때문에 어떤 보험 체계로도 방어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의 결과는 장기적으로는 빈부의 구별 없이 평등하게 관철된다.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학적 위험 요인은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의 사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개별 국가의 개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위험이 전 지구화된 것이다.
셋째, 사회적 불평등의 개인주의화이다. 복지국가의 중요한 기반은 완전고용된 비교적 동질적인 노동자들의 수평적 연대였지만, 유연적 전문화로 인해 작업장 안에 위계 구조가 재도입되며, 고용 체계 또한 불완전 고용이나 저고용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 내부의 이질성을 심화시킴으로써 계급 지위를 해체하며 노동자들을 개인화한다. ‘사회계급’적 속성은 약화되었다. 그것은 이제 사람들의 행동에 훨씬 작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개인주의화하는 경향이 있는 생활방식을 발전시킨다. 경제적 생존을 위해 개인은 이제 자신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진리와 계몽을 넘어선 과학
넷째, 가족 내부 및 외부의 성별화된 공간과 갈등이다. 근대화의 개인화 압력 속에서 산업사회의 근저에 있는 봉건적 성 역할 구분이 해체되고 있다. 이혼율의 증가와 여성의 노동시장의 참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이 현상은 남과 여의 관계를 가족 구조를 통해서 규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가족의 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개인으로서 계획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 및 출산을 둘러싼 테크놀러지의 발전으로 인해 성생활 또한 자연적 성격을 상실하고, 개인들의 결단과 자기 관리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전반적 저고용의 도래는 노동 윤리를 후퇴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자신의 직장에서의 일을 통해서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을 점점 어렵게 한다. 생활 양식의 개인화는 타자와의 차이를 더욱 증대시킴으로써 개인간의 교류의 문화적 전제와 소통 자원을 고갈시킨다. 이로 인해 친밀성을 형성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갈망 또한 증대한다.
다섯째, 진리와 계몽을 넘어선 과학이다. 과학은 진리의 권위를 상실한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위험 앞에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섯째, 비정치적인 것의 정치화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라인강 연안의 사고,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온 삼림의 고사는 생명이 공업에 의해 위협받는 곳에서 세계질서가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주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생태학적 모럴에 입각하여 규명되고 있다. 인간이 위험의 실재를 믿는 한 그 위험은 실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정치와 경제가 이 위험을 무시한다면 새로운 불신과 불안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듯 근대화에 따른 위험을 인정하게 됨에 따라 점증하는 위험의 압력 속에서 독특한 정치적 발화물질이 생기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인 조치의 가능성을 초월한 것들이 이제 정치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다. 예컨대 유해성분의 배출이나 원자에너지 같은 준엄한 기술적, 경제적 필연성도 정치적으로 처리 가능한 변수로 바뀌어버렸다. 위험이 증대함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요구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민주주의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상향이든 하향이든 ‘정당성을 갖는’ 전체주의가 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다. 최악의 상태를 막는다는 구실로 명백히 더욱 나쁜 상태가 초래된다.
일곱째, 결핍의 연대로부터 공포의 연대로 변한다. 계급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에 비해 위험사회를 작동하는 운동은 “나는 두렵다”라는 문장에서 표현된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의 유형은 '불안에서 비롯된 유대'가 생겨나고 정치적 힘이 되는 사회적 시기를 보여 준다.
<계속>
이종식 국제정치학 박사
[ⓒ 설악신문(www.sorak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