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대받던 관악부가 교련대회 덕분에
1976년 5월, 공설운동장에서 이틀 동안 치러졌던 ‘제6회 강원도교련실기대회’는 속초고의 종합우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속초고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에는 관악부의 역할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군대 행사에서 군악대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데, 교련 행사에서는 관악부가 군악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관악부를 홀대하기만 하던 학교가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었다. 관악부에 상당히 많은 지원을 했다.(그 지원금은 음악 관련 예산이 아니라 교련 관련 예산이었을 것이다.)
우선, 악기를 모두 수거해서 악기 수리 공장으로 보냈다. 수리는 물론, 트럼펫이나 트럼본 같은 금관악기는 도금(鍍金)까지 했다. 그래서 필자가 불던 낡은 트럼본도 마치 새 악기처럼 번쩍거렸다. 그것도 은색으로 도금하여 해군군악대전용 은관(銀管) 트럼본 같아 보였었다.
먼저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관악부 전담 지도 강사 선생님도 초빙했다. 그 강사 선생님은 해병대 군악대 출신이라고 했는데, 색소폰이 전공 악기였다. 그런데 편곡도 아주 잘 하셨다. 그래서 그 선생님이 직접 편곡한 곡도 여러 곡 연주했었다.
필자가 속초고 재학 시절에는 학교에 음악 선생님이 안 계셨다고 했다. 그래서 관악부 연습도 우리끼리 했었다. 다음에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필자 동기(23회) 관악부원들은 음악적인 도움을 선배들로부터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거의 독학으로 악기를 익혀야만 했다.
필자만 해도 트럼본을 기본 음계만 악장(樂長) 친구로부터 배웠다. 나머지 부분들은 순전히 독학이었다.(악장을 했던 그 친구는 속초중학교 관악부 출신)
정규 음악 수업은 미술 선생님이 하셨었다. 당시 이복우 미술 선생님은 강릉사범학교 출신으로, 초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시다가 중등으로 옮기신 분이었다. 그래서 풍금 반주를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음악 수업까지 맡게 되셨다. 하지만 당시 음악 수업은 일주일에 한 시간뿐이었고, 그것도 낡은 풍금 반주에 맞추어서 하는 노래 수업이 전부였었다. 그나마 1학년 때만 했다. 그래도 필자는 그 음악 시간이 늘 기다려졌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새로 오신 이상춘 미술 선생님은 사범학교가 아닌, 예술대학 미술과 출신이셨다. 그래서 미술수업만 하셨는데, 그때 1학년 후배(24회)들은 음악 수업을 어떻게 했었는지 모르겠다.
속초고에 정식으로 음악 선생님이 부임한 것은, 그 교련대회 행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 2개월쯤 지난 7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3학년은 음악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필자는 음악 수업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맛있는 간식 제공에 수업 면제(?) 혜택까지
관악부에 대한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간식도 제공했다. 간식 메뉴가 ‘오란다 빵’이었다. 당시로써는 상당히 고급 빵이었다. 학교 매점에서도 팔았는데, 필자는 용돈이 궁해서 제대로 사 먹지 못했던 빵이었다. 그리고 행사 기간에는 음료수(사이다)에 음식점 식사까지 제공했었다.
그런데 관악부원들에게 가장 즐거운 혜택은 수업 면제(?) 혜택이었다. 그게 사실은 학생의 기본 학습권 박탈이었지만.
교련대회를 위해 관악부원들은 3월 초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었다. 그래서 관악부원들은 보충수업은 받지 않았다. 정규 수업만 받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전 수업만 받았다. 그러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1·2교시, 그러니까 하루 두 시간씩만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대회 일이 임박해지자 한 시간도 수업을 받지 않았다. 수업을 완전히 전폐하고 연습에만 집중했었다. 그 지겨운 수업을 안 받으니 정말 신이 났었다. 특히 지겨운 영어·수학에서 해방된 게 가장 즐거웠었다.
연습 장소가 학교가 아닌 것도 아주 즐거웠었다. 감옥같이 답답한 학교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당시, 속초고에는 음악실도 없었다. 그래서 음악 수업은 도서실에서 했었다. 관악부 전용 연습실도 없어서 학교 근처 야산에서 주로 연습을 했는데, 그렇게 야산에서 자연과 함께 하며 연습할 수 있는 것도 관악부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학생체육관(아남프라자 앞에 있는 지금의 생활체육관)에서 할 때도 있었다. 당시 그 체육관은 완공이 덜 된 상태였는데, 그 무렵에 춘천 유봉여고 배구부가 거기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끼 많은 관악부원들인데, 건강미 넘치는 여학생 배구 선수들을 보고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더구나 체육관에서 연습할 때는 강사 선생님은 참여하지 않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그 여학생 선수들을 향해 휘파람도 불고 괴성도 지르면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분열식과 행진 연습은 공설운동장에서 했다. 강사 선생님이 군기 세기로 유명한 해병대 군악대 출신이라 분열식과 행진 지도는 아주 철저하게 하셨다.(그때 그 강사 선생님께 배운 것이, 필자가 교사 시절에 관악부 퍼레이드 연습 지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수업 결손이 많다 보니, 관악부원들의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안 그래도 관악부원들 대부분은 학과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는데…. 그래서 음악교사가 장래 희망이었던 필자는, 대학 진학이 절실했기에 집에서 혼자 따로 공부를 했었다. 국어 과목의 경우, 첫 단원이었던 ‘기미독립선언문’과 그다음 단원 ‘순국선열 추념문’만 수업 시간에 제대로 배웠고 나머지 단원은 모두 집에서 독학을 했었다.
이런 일을 겪었기에 필자는 관악부 지도교사 시절에, 부원들의 수업 결손이 가급적이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속초고 관악부원들이 수업 결손까지 해가면서 체험했던 그 일들이 전혀 무가치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학교 공부보다 더 소중한 공부를 했었다고도 생각한다.
<계속>
임수철
작곡가·전 음악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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