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첫날, 우연찮게 택일이 마침 ‘73주년 국군의 날’이다. 우리 강원지역의 잊혀져가는 역사 재발견 연구탐사를 다녀왔다. 그곳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강원광역울타리 설치지역이라 사전에 양구군청 생태산림과에 유선허락도 받았다. 철망울타리를 넘으려면 사다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침 8시 출발이라 전날 미리 A형 접이식 사다리와 낫 두 자루를 실어놓았다.
그곳은 오지중의 오지마을이다. 양구읍에 속하지만 지름길이 없다. 이웃 방산면을 통해 돌아가야 하는 월경지(越境地)다. 월경지는 행정구역을 뛰어넘는다하여 비지(飛地), 비월지(飛越地), 비입지(飛入地)라고도 부른다. 읍에서 한반도섬 북단 군량리를 지나는 길은 차로 30분 거리지만 굽이가 심하다. 무난한 한전리, 두타연입구, 송현리, 금악리를 지나는 길은 34킬로미터 거리에 50분이 걸린다. 꼬부랑길 2시간 만에 실질월경지 ‘육지속의 섬’ 상무룡리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 용이 춤을 추었다는 전설의 마을 상무룡리(上舞龍里)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다. 다시 낚싯배를 타고 파로호를 가로질러 한참을 가야한다. 육로 입구는 철망울타리와 수풀이 우거져 접근하기 곤란하고, 파로호 수변이 급경사 절개지라 추락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낚싯배도 출발 일주일 전부터 동네 이장한테 두 차례 전화해서 미리 예약해 두었다. 7인승 뱃삯도 왕복이라 꽤 비싼 편이다. 뱃전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이번 탐사에 은퇴교수님을 비롯한 4분이 동행했다. 배에 오르자 궁금한 마음에 “별장터를 찾는 이가 있는지? 마을에 예전별장을 아는 생존자가 있는지?” 이장에게 물었더니 자신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폐허가 되어버린 별장터를 가보았다고 했다. 혹시나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대감이 커졌다. 배가 닿은 곳은 야트막한 산자락이 길게 뻗어 내린 사면구릉지였다.
배에서 내리자 마을이장이 자기 발자국만 따라오라 주문했다. 내려 올 때도 조심하라 당부했다. 가끔 전방에서 떠내려 온 발목지뢰가 있기 때문이란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어깨에 사다리를 메고 조심조심 파로호 절개지 경사면을 올랐다. 숲에 들어서자 얼마 안 되어 반가운 피로호 전적비가 보였다. 전적비를 탁본하여 세운 것이라고 했다. 기단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 휘호(初代 大統領 李承晩博士 揮毫)’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장은 거기까지만 길안내하고 배타고 돌아갔다. 소나무보다 활엽수 잡목이 우거져 꼼짝하기 어려웠다. 각개 전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각각 흩어져 찾다가 발견하면 소리치기로 했다. 탐사 제안자로 조바심이 났다. 얼마나 헤맸는지 석축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퇴락한 층계를 오르니 굴뚝과 벽채가 위태롭게 서있었다. 그마져도 벽채 틈바구니에서 나무와 칡넝쿨이 자라나 무너질 판이었다. 이렇게 방치하다니 한숨이 나왔다.
오른편에 표지석이 있었다. 1986년 5월에 양구군청, 양구경찰서, 양구번영회가 세운 것으로 상단에 한문으로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 李承晩博士 別莊址’, 하단에는 한글로 “6.25동란 중 중공군 춘계 대공세에 맞서 국군 제6사단이 크게 승리한 대첩지 호수를 파로호라 이름 짓고 가장 경치가 좋은 이곳에 1954년 9월 별장을 지어 각료들과 국사를 논의하며 조국통일과 전후복구를 구상하시던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었으나 세월의 변천과 더불어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이곳에 서린 깊은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이 표지를 세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인근에 ‘경호실’표지판, ‘무도장’표지석, ‘우물터’도 있었다. 급한 대로 가지고 간 낫으로 예초작업을 시작했다. 수년전 산불이 나서 큰 나무는 없었다. 평소 익숙지 않은 일이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팔순이 넘으신 원로목사님은 “내 평생에 가장 보람된 하루”라며 필자에게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무사히 선착장에 도착하여 출발하는데 길가에 아금바리 농촌아낙처럼 야무진 사과대추가 가지가 부러질 듯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어찌나 크던지 우적우적 허기를 달랬다. 대추열매 사이로 바라보이는 모처럼 맑게 갠 가을하늘이 시원하게 파랗다.
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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