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참을 뜻하는 ‘젠노리’
표준말이나 타지역의 말에 떠밀려 사라지는 지역말 중에는 입에 침이 돌게 만드는 맛있는 말이 있다. ‘젠노리’라는 말이다. 우리지역에서는 끼니 외에 먹는 음식을 ‘젠노리’라고 했다.
2008년에 발간된 <한국언어지도>를 보면, 우리나라 표준말로 정한 ‘곁두리’는 지역별로 다양한 말로 사용되었다. ‘곁두리’는 농사꾼이나 일꾼들이 끼니 외에 참참이 먹는 음식을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곁두리’보다는 ‘새참’이라는 말에 더 익숙하지만, 정작 강원도 지역에서는 ‘젠노리’나 ‘제누리’라는 말을 썼다.
<한국언어지도>를 보면 표준말인 ‘곁두리’는 서울과 경기도 일부로 그 사용 지역이 넓지 않다. 대신 우리가 익숙하게 들은 ‘참’이나 ‘새참’은 경상도 일대에서 널리 쓰는 말이다. 그리고 ‘샛밥’은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새’는 충청북도, ‘샛거리’는 전라도 일대에서 주로 썼다.
강원도에서는 ‘젠(제)노리’또는 ‘제누리’라는 말을 주로 써왔다. ‘젠노리’ 또는 ‘제노리’는 강릉 이북 영동지역과 춘천, 원주, 철원을 제외한 영서지역에서 썼다. 이와 비슷한 ‘제누리’는 춘천과 원주, 경기도 동부지역에서, ‘전누리’는 철원 일대에서 썼다.
2021년에 발간된 <말모이, 다시쓰는 우리말 사전>에는 강원도 지역말로 ‘제누리’가 나온다. 원주와 인제는 ‘제누리’, 양양과 평창은 ‘젠노리’라고 썼다. 사용하는 용례도 나온다. 양양에서는 “어머니는 젠노리를 머리에 이고 논두렁길을 걷고 또 걸었다”라고 썼다. 평창에서도 “아무리 힘든 농사도 젠노리를 먹을 때면 신난다”라고 썼다. 춘천의 경우 아침과 점심 사이에 먹는 음식을 ‘점심제누리’, 점심과 저녁 사이에 먹는 음식을 ‘저녁제누리’라고 했다.
젠노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칼국수를 많이 떠올린다. 양양 출신 한 출향인은 “야양에선 젯노리라고 오후 3시경 새참으로 호박, 감자 칼국시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논에 나가서 시냇물에 인부들 물장난 하시고 드셨던 새참”이라고 했다.
<말모이, 다시쓰는 우리말 사전> 발간에 고성지역 대표로 참여한 남동환씨는 “젠노리 느른국 한동우 머리에 이고 모 숭구는 일꾼에 얼릉 같다줘야지”라고 용례를 들었다. ‘느른국’은 칼국수를 말한다. 칼국수를 한 솥단지 끓여 모를 심을 때 젠노리로 가져가는데, 양이 부족하다 싶으면 물 한바가지 더 부어 늘려서 먹을 수 있기에 ‘느른국’이라 부른다고 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느른국’은 반죽을 눌러서 만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의견과 여러 사람이 나눠 먹기 위해 양을 늘리기에 붙은 이름이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젠노리’는 지역 음식점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젠노리’, ‘제누리’라고도 쓰고, 변형되어 ‘잿놀이’, ‘잿노리’라고도 쓴다. ‘새참’이라는 말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있는 지역말 ‘젠노리’가 식당이름으로 다시 살아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2009년 강원도농업기술원이 주관한 강원음식 활력축전에서 고성군생활개선회장 진혜련씨가 출품한 ‘고성 잿놀이 상차림’이 대상을 수상했다. ‘잿놀이 상차림’은 농번기의 고된 노동을 달래주는 위로의 밥상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고성에 향토음식점 ‘잿놀이’가 들어섰다.
2014년에는 춘천의 골프장 안에 ‘젠노리’라는 이름의 카페가 들어섰다. 젠노리를 영문으로 Zennori로 표기하고, “젠노리는 새참의 강원도 방언입니다”라는 표기를 덧붙였다. 평창에는 젠노리식당, 춘천에는 제누리기사식당, 양양에는 잿노리식당이 확인된다.
화장실을 뜻하는 ‘정낭간’
2019년 11월 속초 상도문마을 주민인터뷰 과정에서 생소한 지역말을 몇 개 확인했다. 상도문마을에는 예전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었는데, 이곳을 ‘잿가마’라고 불렀다. ‘재’는 ‘기와’를 뜻하는 지역말이다. 한 어르신은 인터뷰 중에 “우리집에 1백년이나 더 된 망이 있다”라고 했다. “망이 뭐지요?” “망을 몰라요? 맷돌이잖아.” 우리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맷돌을 ‘망’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르신들은 들이나 벌판을 ‘버덩’이라고 하고, 나무를 ‘낭구’라고 불렀다. ‘반짝조우’라는 말도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종이, 다름 아닌 ‘비닐종이’를 뜻한다. 상도문마을에서 예전에 많이 만들어 팔던 도토리묵은 재랭이묵이다. ‘재랭이’ 또는 ‘재래’는 졸참나무의 도토리를 말한다. 재랭이로 쓴 상도문마을의 묵은 찰지고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재랭이 채취가 힘들어 그 맛을 쉽게 맛보기가 어렵다.
같은 우리 지역인데도 바닷가와 농촌지역 말이 다를 때도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명태 아가미를 ‘서거리’, 아가미로 담근 깍두기는 ‘서거리깍두기’라고 한다. 그런데 상도문을 비롯한 농촌지역 어르신들은 ‘아가미’를 ‘저벌기’라고 한다. 저벌기 젓갈을 깍두기에 넣으면 아주 맛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생소한 말은 ‘정낭간’이다. 처음 이 말을 듣고는 잘 몰라서 거듭 몇 차례 물어보았다. ‘정량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찾아보니 없었다. 간신히 찾은 게 ‘정낭(淨廊)’ 또는 ‘정낭간’이다. 정낭은 ‘깨끗이 하는 별채’로 해석되는데, 변소를 뜻하는 말이다. 지금은 대소변을 보는 곳을 변소도 아니고 화장실로 부르지만, 예전에 우리 지역에서는 ‘정낭간’이라고 불렀다.
2008년에 발간된 <한국언어지도>를 보면, 변소를 지역마다 다르게 불렀다. 서울,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에서는 ‘뒷간’, 전라도는 ‘칙간’, 경상도는 ‘통시’, 강원도 영서와 경상도 내륙은 ‘변소’라고 불렀다. 우리 지역인 강원도 영동과 경상도 내륙 일부지역은 ‘정낭’이라고 불렀다. 절에서는 변소를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으로 ‘해우소(解憂所)’라고 했다. 일부 사찰에서도 ‘해우소’가 아니라 ‘정낭’을 쓰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정감 있는 우리 지역말 ‘정낭’을 다시 살려 쓰면 어떨까 싶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지역말을 버리기 시작했다. 산업과 문화,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자연히 사라진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교에서 배운 표준말로 지역말을 대체해 버렸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쓰는 말에서 지역색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변화를 어쩔 수 없겠지만, 문화가 담긴 소중한 지역말까지도 다 버릴 필요가 있을까? 좋은 지역말을 다시 살려 쓰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상도문마을에서는 도토리묵을 재랭이묵이라고 불렀다. ‘재랭이’ 또는 ‘재래’는 졸참나무의 도토리를 말한다. 재랭이로 쓴 상도문마을의 묵은 찰지고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 지난해 속초사자놀이보존회가 상도문마을에서 연 생생문화재에서 참가자들이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아 도토리묵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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