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기는 파도의 순 우리말
강원도 동해안 일대 바닷가 사람들은 파도(波濤)를 ‘멀기’ 또는 ‘멀개’라고 부른다. 이 ‘멀기’라는 말은 파도라는 말이 자리잡기 전에 쓰던 순수 우리말이다. 동북쪽에서 오는 ‘새멀기’, 남쪽에서 오는 ‘맞멀기’도 있다. 새쪽, 마쪽 등은 바람의 방향과 같다. 그리고 작은 파도는 ‘까펄기’(강릉에서는 까풀멀기로 채록), 파고가 높아 크게 넘어가는 파도는 ‘와다리’, 해일성이 있는 너울성 큰 파도는 나울 또는 나부리라고 했다. 나울은 너울을 뜻한다. 특히 ‘서마나울’은 동남쪽에서 오는 큰 파도를 뜻하는 말로, 태풍이나 폭풍을 동반한 파도를 뜻한다.
고 이반 작가의 희곡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는 속초에 정착한 함경도 실향민들의 말이 나온다. 여기에도 ‘멀기’가 제법 나온다.
“멀기소리 들으니 마파람 같소. 이런 날은 후리질만 잘하면 만선이지비.”
“멀기가 몹시 치던데, 이런 날은 배질하기두 힘들낀데. 앞이 보여야 배질을 제대루 하지비.”
“야, 아아들 애비는 이 멀기 치는데 죽은 나무를 타구 시퍼런 가물에 떠있다.”
“아바이들이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것 아이면 어째 바다에 나갔습메? 난 이전 멀기소리만 들어두 숨이 넘어갈 것 같습메.”
파도라는 한자어보다는 멀기라는 순 우리말이 더 실감난다. 지금이라도 마치 하얗게 밀려오는 물결이 연상이 되는 ‘멀기’라는 말을 다시 살려서 쓰면 어떨까 싶다.
- 고맙지만 위험한 해류, 썰물(샛물)
동해안은 서해안과 지형적 특성이 달라 물살의 흐름도 다르다. 동해안에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에서 쓰는 ‘밀물’, ‘썰물’이라는 말이 없다. 대신 동해안은 바람과 기온의 차이로 생겨나는 물의 흐름인 해류에 따라 ‘들물’, ‘날물’이라는 말을 쓴다.
동쪽 바다에서 서쪽 육지 쪽으로 들어오는 물은 ‘들물’이라 하고, 서쪽 육지쪽에서 동쪽 바다로 나가는 물은 ‘날물’이라고 한다.
해류에 관한 말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다. 보통 우리가 쓰는 바람의 방위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방위는 ‘-으로부터’라는 ‘오는 방향’에 따라 붙지만, 해류의 방위는 ‘-으로’라는 ‘가는 방향’에 따라 붙는다. ‘샛바람’은 북쪽 또는 북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지만, ‘샛물’은 북쪽 또는 북동쪽으로 흘러가는 해류이다.
보통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해류를 ‘샛물’ 또는 ‘설물’, ‘썰물’이라고 한다. ‘새’와 ‘설’, ‘썰’은 모두 북쪽 또는 북동쪽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샛물’보다는 ‘썰물’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썰물’은 서해안의 ‘썰물’과는 다른 말이다.
동해안에서는 한 겨울 연근해에서 남에서 북으로 ‘썰물’이 흐를 때가 있다. 이때 명태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 말 동해안 최북단 어로저지선 부근에 명태가 많이 잡혔다. 수백 척의 명태바리 어선들이 어로저지선 근처에 올라가서 그물을 부리고 낚시를 풀었다. 자칫 그물이나 낚시가 북으로 떠밀려가고, 조업 중인 배가 북으로 떠밀려가서 북에 피랍되기도 했다. 한겨울 썰물은 고맙지만 위험한 해류였다.
남쪽인 마쪽으로 흐르는 해류는 ‘맛물’이다. 맛물은 채록할 때 ‘맞물’, ‘만물’, ‘맏물’ 등으로도 표기했다.
우리 지역에서는 샛물과 맛물, 들물과 날물을 섞어서 해류의 방향을 구별하기도 한다. ‘마안들물’은 남서쪽 해안으로 들어오는 물, ‘새안들물’은 북서쪽 해안으로 들어오는 물이다. 반대로 ‘새발물’ 또는 ‘새안낼물’은 북동쪽 바다로 나가는 물을 뜻하며, ‘마발물’은 남동쪽 바다로 나가는 물을 뜻한다. 이런 말들은 동쪽은 바다, 서쪽은 육지로 구별되는 동해안의 지형에 맞춰진 해류 이름이다. 이밖에도 바닷물 표층수와 저층수가 서로 반대로 교차하듯 흐르는 물을 ‘짝물’이라고 한다.
- 소중한 우리 지역 바닷가 말들
속초를 비롯한 바닷가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로 ‘뱃머리’가 있다. 해물 음식점 상호로 속초에는 ‘뱃머리 야식’, 서울에는 ‘속초항 뱃머리’가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뱃머리’는 ‘배의 머리 부분’을 뜻하는 표준말이 아니다. 배를 대는 곳, 부둣가나 어판장을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작업 나간 배가 들어와서 뱃머리에 일을 나갔다”라는 식으로 썼다. 갯배를 대는 선착장인 도선장도 ‘갯배머리’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콘크리트 부두가 들어서기 전에는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나무다리를 설치해 배를 댔다. 이 잔교시설을 지역에서는 ‘다릿발’ 또는 ‘산밧다리’라고 불렀다.
망선바리(그물명태잡이)를 비롯해 바닷가 유자망 작업과 관련된 말들도 주목할 만하다. 명태를 그물에서 벗겨내는 작업을 ‘베끼다(뻬끼다)’라고 하며, 그물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을 ‘추린다’고 한다. 산 지세를 보고 바다에 그물을 놓는 것을 특정해서 ‘알기본다’라고 하며, 그물이 뒤틀려 감긴 것을 ‘순대 먹었다’, 그물이 서로 엉키는 것을 ‘서받는다’라고 한다.
바다 지형과 관련된 말들도 있다. 물속에 잠긴 암초나 바위를 ‘성에’라고 부른다. 그물이 성에가 있는 곳으로 잘못 흘러가면, 그물이 다 찢어지고 망가진다. 수면 위아래로 떠올랐다가 잠겼다 하는 바위를 ‘무데이’라고 하는데, 무데이는 ‘무데기’의 강원도말이라고 한다. 바다 밑에 있는 바위 꼭대기를 ‘꼭두’, ‘바닷물이 번쩍거리는 현상’을 ‘시거리’라고 한다.
왜 우리 지역 사람들도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은 알아도, 동해안의 ‘들물’과 ‘날물’, ‘맛물’과 ‘썰물(샛물)’은 잘 모를까? 학교에서 말을 배울 때 지역말도 같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소중한 우리 지역말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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