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등모 어르신은 100세 현역으로 지금도 거진시장에서 92세의 아내와 함께 쌀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양 옹은 남들이 병마로 고생할 때인 일흔 즈음에 쌀가게를 시작했다. 양 옹은 다리가 약간 불편하긴 하나 지금도 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하는 등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본보 1500호, 5월 24일자 보도)
고령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어르신을 보면 고생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한 명의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다년간 겪었다. 그 시기는 한국전쟁 때이다. 양 옹은 전쟁기에 전장과 포로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여러 차례 지켜봤다.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을 맞아 양 옹이 겪었던 이야기를 정리해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해방 후 ‘우리나라’ 있다는 걸 알아
양등모 어르신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강원도 김화군 통구면 통현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양 옹이 살던 마을은 번화한 곳이 아니어서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인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을 향해 가던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관공서에서 마을 주민들이 가진 쇠붙이를 모조리 가져갔다. 당시 마을에서는 2명이 일본군에 징병을 당했으며 3명이 노무자로 끌려갔다. 마을이 외진 시골이라 8.15해방 소식은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후 며칠이 지나서 알게 됐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한 달쯤 지나자 징용과 징병을 갔던 이들이 한두 명씩 마을로 돌아왔다. 통현리에서는 징병·징용 갔던 이들이 모두 돌아왔으나 이웃 마을에서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1922년생인 양 옹은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이라는 ‘우리나라’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 비로소 일본과는 다른 ‘우리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화군이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인 관계로 양 옹은 해방 이후 전쟁이 한창 이어질 때인 1951년까지 북한 정권을 경험했다. 당시 마을에서 가난한 이들이 먼저 조선공산당(조선노동당 전신)에 입당했고 당국은 이런 사람 중 한 명을 구장으로 삼았다. 1946년 5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으로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인해 양 옹은 자신이 소작하던 땅에서 소작료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 양 옹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이전 땅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밤에 사람들 몰래 이전 지주에게 쌀을 가져다주곤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마을에 몇 사람 더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이전 땅 주인에게 쌀을 가져다주는 이는 사라졌다. 마을에는 토지개혁을 반기는 주민들이 많았으나 지주들이 알게 될까 싶어 사람들은 겉으로 기쁨을 표현하지 않았다. 양 옹은 토지개혁 시 ‘악질 지주’는 토지만이 아니라 전 재산이 몰수된 것으로 아는데 통현리에는 이런 사람이 없었다.
애국미 헌납운동…전쟁에 동원
가을걷이가 끝난 후 세금은 현물로 납부했다. 현물세는 2할 5부(25%)였는데 이 외에 ‘애국미’라는 것이 있었다. 애국미 헌납은 표면상 자발적이었으나 양 옹의 기억으로는 상당히 압박감이 드는 것이었다. 애국미 헌납운동은 황해도 재령의 한 농민이 토지개혁 때 받은 땅에서 거둬들인 쌀을 당국에 헌납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통현리에서도 열성 당원들이 앞장서서 애국미를 납부했다. 추수 후에 마을 공회당에서 부락회의가 열려 애국미 납부량을 정했다. 회의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조국을 위해 애국미를 납부하자고 촉구하며 적지 않은 양을 애국미로 내겠다고 선도적으로 다짐했다. 마을에서 형편이 좋지 않은 이가 이렇게 하면 이들보다 집안 사정이 좋은 이들은 눈치가 보여 애국미를 더 많이 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어떤 이는 애국미 납부에 불만이 컸지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울며 겨자 먹기로 더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양 옹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현물세와 애국미를 합치면 추수 수확량의 5할 정도를 납부했다.
6.25가 발발한 후 양 옹은 한동안 전쟁에 동원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었다. 양 옹은 ‘1.4 후퇴’ 이후 중국 인민해방군이 남하할 무렵 인민군에 노무자로 동원됐다. 양 옹은 후방교란을 위해 대구까지 침투하는 부대를 따라갔다. 하지만 양 옹이 속한 부대는 대구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양 옹은 동료 세 명과 함께 경상도 어딘가에서 탈출해 흰 수건을 흔들며 국군에 투항했다. 이틀쯤 후에 강릉 옥계면사무소로 이송됐고 3~4일 후 묵호항에서 미군 상륙정(LCT)을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이내 거제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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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기자 camp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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