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낯선 얼굴이 보였다. 한 필지 건너라 먼발치에서 보았는데, 오후에 숲에서 나오다가 마주쳤다. 허름한 옷차림에 정글모를 쓴 채 한 손에는 삽, 다른 손에는 쥐똥나무를 들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 의아했던지 경계심어린 눈빛이었다. 그래서 먼저 인사를 했다.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색하게 지나치는 것보다 오히려 먼저 다가가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어서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여기 토지는 K 어르신 땅인데 새로 샀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르신 평안하시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셨어요.”라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서 “아니 가을까지도 건강하셨는데 어떻게 갑자기”라는 말만 했다. 별안간 돌아가셔서 가족들도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이웃 밭주인 C 어르신도 안 보이신다고 했더니 또다시 “그 어르신도 며칠 전 돌아가셨어요!”라 했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나도록 자꾸 생각이 났다.
왜냐하면 언제나 밭에만 나오면 뵈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농부가 된지도 20년이 되어간다. 선친께서 고향농지를 우리 삼형제에게 조금 물려주셨는데 연로하신 큰형님이 농사일이 힘이 부친다고 팔자해서 나눠받았다. 농지를 상속받은 돈이니 농지를 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학사평마을 식당에서 점심식사 중에 소개받은 토지였다. 어떤 젊은 사람 땅이 강제경매에 넘어가게 생겼으니 도와달라는 부동산중개사의 요청에 별 생각 없이 덜컥 사게 됐다. 그렇게 생뚱맞게 당시 자활촌, 지금의 바람꽃마을 농부가 되었다.
충청도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랐으니 아주 농사일이 생경하지는 않았다. 농지원부도 신청하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가서 농업경영체로 등록도 하고, 바람꽃마을 농협영농조합원이 되었다. 농업경영체 확인서에 본인은 대표경영주로, 가족은 조합원 또는 등기이사로 되어 있다. 매년 농업기술센터에 유기농퇴비, 유박비료도 신청하고, 농협경제사업소에 들러 농기구와 작물에 필요한 농자재도 사고 간혹 영농컨설팅도 받는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숙한 투자방법이었다. 약삭빠른 사람 같으면 다른 투자처를 찾았을 것이다. 아마 대도시 아파트를 샀더라면 천정부지로 치솟았을 것이고, 가까운 바닷가에 작은 카페자리를 샀더라면 금싸라기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원로목사님이 여담으로 새로 세워지는 교회 근처에 땅을 사면 투자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셔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침례교회 언저리에 사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요즘엔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필자가 그러하니 돌아가신 두 분 어르신들은 정말로 투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황소처럼 일만 하신 분들이다.
그때부터 여태껏 만난 어르신들이다. 교수가 주말농사를 짓는다니 미덥지 못해 오가며 많이 가르쳐주셨다. 농사만큼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수준차이다. 풀은 게으른 농부를 용케도 안다. 처음에는 풀을 뽑으면서 마음의 잡초도 뽑겠다고 여유를 부리지만 끈질기게 자라나는 풀을 당할 장사는 세상에 없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일손 때문에 손쉬운 제초제를 사용한다. 그러니 논둑과 밭둑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 해마다 두더지가 허물고, 빗물배수가 쓸어가도 그냥 둔다.
그래서 필자는 쥐똥나무를 밭둑에 심기로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이웃 어르신들은 그런 농사꾼이 아니셨다. 하루 종일 밭작물을 살피고 잡초와 씨름을 하셨다. 언제 밭에 나오셨는지, 끼니는 잡수셨는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져야 일손을 놓으셨다. 삼복더위 땡볕도 아랑곳 아니 하셨다. 필자는 잠시 쪼그리고 앉는 것도 불편해서 큰아들이 사준 낚시의자를 사용하는데 어르신은 털버덕 앉아 허리 펴는 일도 없다. 인내심 없는 젊은이를 부끄럽게 만든다. 팔십이 넘은 연세에 지난 가을에도 트랙터, 트럭과 경운기 등의 동력 농기구를 능숙하게 다루셨다.
LH 땅 투기 공직자는 어르신께 혼쭐나야한다. 우리 지역에도 동서고속화철도 속초역사 부근에 상당수 공무원이 땅을 갖고 있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내가 만난 평생 농사일로 세월을 보낸 이웃 어르신들은 그 어려운 ‘이해충돌방지법’이 무엇인지, 그 법이 왜 필요한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필요 없이 살아오신 분들이다. 일동 차렷! 어르신께 대하여 경례!
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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