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운이 기울어 가는 구한말, 쓰러져가는 나라를 살리고 민중의 삶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교육의 힘이라는 취지로 시작된 교육운동이 간성군 일대에서 들풀처럼 번져 나갔다. 간성군 신학문은 건봉사에서 세운 봉명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06년 8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명진학교의 이름으로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 김보운씨가 신학문 교육을 열심히 진흥하기 위해 사찰 안에 20원을 새롭게 보조하여 보통학과 과정의 학교를 설립하고 사찰 내 승려와 청년 남자를 모집하기로 했다”는 광고기사가 실렸다. 이 무렵은 양양군에 현산학교가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하던 중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9일자와 20일자 양일간 3면 1단에 두 번에 나누어 ‘봉명학교취지’가 실렸으며, <황성신문> 1월 26일자에도 1면 5단 잡보(雜報)란에 같은 원문으로 ‘강원도간성군금강산건봉사봉명학교취지서(江原道杆城郡金剛山乾鳳寺鳳鳴學校趣旨書)’가 실렸다.
단일 사찰서 세운 최초의 학교
그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1907년 1월 봉명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면, 1906년 5월 불교계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들어선 지 1년도 안 되어 건봉사에서 봉명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불교계 합동의 출연으로 설립된 명진학교와는 달리 봉명학교는 단일 사찰에서 세운 최초의 학교이다. 그만큼 건봉사의 사세도 컸지만, 신학문에 대한 열망도 강렬했다. 봉명학교 준비과정에서 불교계 대표학교인 명진학교와 깊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진학순(秦學純)과 김보운(金寶雲) 두 명이 발기인 이름으로 올린 ‘강원도간성군금강산건봉사봉명학교취지서’ 일부 내용을 통해 건봉사 봉명학교 설립의 뜻을 살펴보았다.
“우리 대한은 유불선 3도가 형세는 속로(束蘆, 서로 묶인 갈대)와 같고 세 발 달린 솥밭(鼎足)같이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선(仙)은 그림자 같아 논할 바 없고, 유(儒)의 6경은 입으로는 막힘이 없으나 변화 없이 완고하고, 불(佛)의 3장(藏)은 마음이 통하고 존귀하나 세상물정에는 어리석기만 하다. 누가 어두운 앞길에 등불을 밝힐 수 있으며, 누가 길 잃은 나룻터에서 뗏목이라도 놓아서 건네줄 수 있겠는가.
지금 세상물정에 어둡고 무기력해서 우리 동방예의지국은 하루아침에 외국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우매한 부녀자나 어린 아이일지라도 무지함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는데, 하물며 갓 쓴 선비나 머리 깎은 중들은 세상 이치를 조금 안다는 사람들로서 어찌 국운을 회복할 방책을 간절히 원하지 않겠는가.
지금 곳곳에 공립 또는 사립학교가 더욱 많이 세워져 청년, 남녀, 승려, 고아들이 앞 다투어 학문에 매진하니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이는 나라를 위한 기초이며 국민을 이끌 나침반이다.”
“동서양의 신학문과 역사를 모두 살펴보게 되면 어찌 한(漢)나라와 송(松)나라의 기록인 통감 몇 편에만 그칠 것인가. 우리나라와 세계의 흐름과 원리를 분별할 줄 안다면 반드시 개화(開化)의 이치를 알게 되어 뛰어난 영재가 배출되고 거센 시류를 헤쳐 나가는 묘책을 찾아 힘차게 외칠 것이다. 우리가 방어할 힘을 갖추면 누가 감히 업신여길 것인가. 임금께 애국 충성하고 산업을 일으켜 국민을 살리고자 한다면 이같은 교육을 미루고 무엇을 하겠는가.”
“신학문 교육에 의지하여 성인들의 가르침에 힘쓴다면 새의 두 날개와 같을 것이며, 문명 발달을 체득하고 불교에 뜻을 둔다면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을 것이다.”
발기 취지문에서는 건봉사는 관동지방의 대찰(大刹)로 수천 칸의 절과 수백명의 승려가 있다고 소개하고, 학교를 세워 불교의 큰 뜻을 연구하고 신학문을 교육하여 원효와 보조, 서산, 사명의 뜻을 잇고, 요순시대보다 더 나은 태평시대를 만들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취지서를 볼 때 봉명학교는 비록 사찰에서 세운 학교지만 순수 불교 학교는 아니었다. 학교의 이름 봉명(鳳鳴)은 유학의 교범인 서경(書經) 중에 있는 ‘순(舜)임금 때 음악 소소(韶簫)를 아홉 번 연주하자 봉황이 찾아왔다(韶簫九成鳳凰來儀)’는 문구에서 차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봉명이라는 학교 이름이 요순의 태평시대를 뜻하는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으로 선비(君子)와 승려(禪侶)들이 앞장서서 진보개명(進步開明)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봉명학교는 불교계와 유림의 혁신을 함께하는 신학문 교육기관이었다. 취지서에 김보운 건봉사 주지 앞에 이름을 올린 진학순 교장이 유학자 출신으로 초빙된 것은 아닌가 싶다. 아무튼 봉명학교는 신학문의 뜻을 위해 종교의 벽을 크게 뛰어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
봉명학교는 개교한 그해 4월 불교계에서는 최초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빌린 차관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취지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1907년 4월 19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건봉사 봉명학교 교직원 10여명과 승려와 학생 176명, 만일회염불계의 이름으로 146원 76전을 기탁했다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17일자에는 불교학교인 명진학교에서 건봉사 봉명학교 강사 이회명(李晦明)씨가 기부금 20원을 보내왔다고 광고했으며, 6월 22일자에는 봉명학교 춘기운동회가 부근 팔음리 벌판에서 거행되었는데 관람객이 3천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1909년 6월 30일자에는 간성군 구산면 월안리에 사는 최돈철씨가 봉명학교 내에 측량과를 설립하고 열심히 가르쳐 졸업생이 10여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1910년 6월 4일자에는 봉명학교에 누런 수건을 쓰고 누런 옷을 입은 사람 39명이 총과 칼을 가지고 들어와 돈 40환을 빼앗아 갔다고 전했다.
<매일신보> 1917년 8월 9일자에는 건봉사에서 하기 유학기간을 이용하여 당사 유학생으로 동경에 4~5년간 유학 중이던 이지광(李智光) 화상을 교사로 하여 봉명학교 내에 1개월간 국어강습소를 설립하여 강습생이 5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봉명학교는 1920년대 이르러 더욱 활발한 교육활동을 펴 유치부와 초등부, 중등부의 학제를 두고 영어와 외국어, 지리, 역사, 수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수업만이 아니라 강연회와 연극, 가장행렬 등도 활발했으며, 민속놀이와 축구 등 스포츠와 청년회 등 단체와 모임을 장려했다. 건봉사는 봉명학교 출신들을 한번에 14~15명씩 일본에 유학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대동단의 핵심 인물로 의친왕의 망명을 도모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한 독립운동가 정남용(1896~1921)은 건봉사 승려 출신이자 봉명학교 졸업생이다. 건봉사에 시비가 세워진 월북 대중가요 작사가 조영출과 한국 문단계를 수차례 발칵 뒤집어 놓은 풍운아 시인 조영암, 정토사 주지를 지냈던 고 박설산 스님 등이 봉명학교 출신이다.
엄경선 설악닷컴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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