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사월이 되니 생각나는 몇 가지 단상들이 있다. 하나는 오래전 대학 신입생시절, 왜 달려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친구, 선배들과 삐질삐질 땀 흘려가며 무작정 달렸던 4.19 기념 하프 마라톤이다. 사실 그때는 4.19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께 뛴다는 행위가 주는 묘한 동질감, 연대의식 등으로 막연하게 좋았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해석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생경스러웠던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이다. 4월이면 여러 곳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 유명한 시구에 ‘왜 4월이 잔인하단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만물이 소생하는 봄, 4월이 잔인한 것은 작고 연약한 씨앗이 겨울의 언 땅을 뚫고 밖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추억이나 욕망 없이 모든 것이 잠든 겨울이 오히려 따뜻하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수용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무실 근처에서 발생해서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2년 전의 고성·속초 산불이고, 마지막 하나는 7년 전 세월호와 함께 수장되었던 꽃다운 아이들에 관한 기억들이다.
살다 보면 눈앞에 닥친 시급한 일부터 해결해야 하기에 너무나 많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지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것들을 기억하기엔 우리 뇌의 용량이 부족해서 덜 자극적인, 우리의 뇌가 덜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것들부터 잊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영광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은 종종 ‘꼰대’라고 비꼼을 당한다. 요즘에는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그들의 언사를 카페에서 자주 마시는 카페라떼를 빗대서 ‘라떼족’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문득 ‘라떼족’과 어감이 비슷한 ‘레테의 강’이 떠올랐다.
‘레테’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망각의 여신이자 강이다. 망자가 사후세계를 지배하는 하데스 신의 명계로 가면서 건너야 하는 저승에 있는 다섯 개의 강중의 하나로 망각의 강이라고 불린다. 신화에 의하면 망자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명계로 가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어느 정도 잊어도 되는 부분이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부분들도 있다. 자주 접하는 말 중에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의 영광을 되뇌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치욕적인 과거를 쉽게 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요즘까지도 자주 참칭당하게 되는 우리 민족의 특성 중 하나는 쉽게 끓어오르고 또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이라고 불리는 성품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폭발력이 있어 좋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력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코로나 시기를 거쳐 오면서 ‘NO JAPAN’이라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처음에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꾸준히 지속되어 왔지만 어느샌가 희미해지고 이슈의 전면에서 퇴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직 레테의 강물을 마실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한 이슈들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7년 전 그날의 기억을 채 추스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며칠 뒤에 찾아본 매스컴 등의 자료들 속에는 여전히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발걸음들이 있었고, 아직 미흡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손길들을 확인했다. 하얗고 노랗고 붉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꽃피던 봄날에 스러져간 아이들의 기억들로 인해 마음이 허하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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