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 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이하 중략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어릴 적 필자가 살던 고향 마을의 집들은 담장이 없었다. 우리 집만 담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동네의 다른 집도 담장을 높게 올린 집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 높지 않은 담장을 두른 건물은 면사무소와 지서(지금의 파출소)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지켜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러니 담장을 쌓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살림살이들이 조금 나아질 무렵부터 울타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이 사철나무로 생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하더니 해가 지나면서 이집 저집에서 측백나무나 노간주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운치 있던 생 울타리가 블록 담으로, 거기에다 깨진 병조각으로 날을 세운 흉측한 담장이 생기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물리적 담장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장이 더 문제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몇 년 전 공광규 시인의 시 ‘담장을 허물다’를 김슬기 그림책 작가가 재화한 그림책을 펴냈다. 그 때 느꼈던 마음의 평안함을 생각하며 그림책을 다시 펼치며 시에 담긴 의미를 재음미해보았다. 오래 된 담장 하나를 허물었을 뿐인데 텃밭이, 까치집이 있는 느티나무와 해와 달이 떠 있는 연못이 정원이 되고, 저 멀리 있던 월산과 청태산이 눈 안에 들어오고, 마침내 광활한 자연과 우주가 다 내 품안에 들어오는 그림을 보다 보면 마음이 스르르 편안해진다.
우리는 흔히 비우고 나누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비움’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움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누릴 것이 더 많은 세상에서 비움으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일은 말하기는 쉬우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진짜 어렵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을 덮으며 또 한 긋 이런 생각을 해본다. 물리적 담장을 허무는 일도 쉽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장을 허무는 일이 더 어려운 시대가 아닐까? 지금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얼마나 높은, 그리고 몇 겹의 담장을 나도 모르게 쌓아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치여 마음이 무거운 날에 필자는 그림책으로 펼쳐지는 시 한 편을 읽으며 공시지가 0인 내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비우려는 노력을 해 본다.
김종헌
시인·설악문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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