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시립도서관에 갔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일요일이 전혀 바쁘지 않았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남아도는 시간에 아내와 함께 간 도서관은 방역뿐만 아니라 대출 시스템도 편리하게 변해 있었고 서가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들 중에는 눈에 띄는 신간들도 제법 많았다. 그 중에서 구미에 당기는 책 몇 권을 빌려서 나왔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코로나를 포함한 여러 가지 요인 탓에 업무적으로도 비교적 여유 있는 1월을 보냈다. 그 때문인지 TV를 시청하는 시간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러던 중 TV채널을 아무 생각 없이 돌리다가 우연히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속된 말로 ‘꽂혔다’. 도서관 서가에 진열되어있는 수많은 책들 중 눈에 띄는 책 한권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싱어게인’은 말 그대로 다시 노래 부른다는 프로그램이다. ‘무명가수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고 무명가수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노래와 음악이 조명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취지의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아이돌 선발부터 힙합, 트로트, 심지어 성악을 베이스로 한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수많은 경연프로그램들이 제작되고 방영되었지만 포크, 록큰롤, 발라드, 댄스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연령대의 무명가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런 형식의 프로그램은 처음이라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 원석을 뽑는다는 오디션 특유의 취지를 벗어나 크게 조명 받지 못했던 가수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는 프로그램의 취지도 좋게 느껴졌다.
사실 무명이라는 말은 어패가 있는 말이다. 각자의 이름이 분명 있을진대 타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름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 일은 서글픈 일이다. 결국 존재감이 없다는 말일 텐데 프로그램이 진행되면서 각 라운드마다 1호에서 71호까지 번호로만 불리던 참가자들이 각자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부분은 제법 감동적이었다.
새해가 되었고 모든 이들이 1월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출발했지만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새해 각오는 희미해져있고 무디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싱어게인’이 있다. 설날이 바로 그것이다. 새해를 시작한 지 한 달여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는 다시 새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다시 한다. 설날부터 다시 한해를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설날은 간혹 1월 말경에 걸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2월에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해마다 11월이면 한 해의 한 달이나 남은 시간이지만 촉박하고 끝나간다는 느낌인 반면에 같은 한 달이어도 2월은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시작해!’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프로그램은 30호라고 불리던 무명가수가 우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를 보면서 겸허함과 음악적 재능, 그리고 쉽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젊은 패기, 아마도 많은 고민과 고뇌와 사색의 흔적이었을 것 같은 언변, 그것을 통해 그냥 말재주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경쟁자들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진심을 이야기하는 듯한 밝고 순수함, 경쾌함을 느끼게 되었다. 또 그를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최고’보다는 ‘독보적인, 유일한’이라는 단어가 더 최상의 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인생도 남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값지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려고 마음먹고 사는 일도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한해의 막바지인 11월, 12월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하물며 지금은 2월이다.
전형배
데일리F&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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