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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신문 30년, 다시 보는 그 시절<30> / 지역 향토사가 된 지역 인물의 삶
등록날짜 [ 2020년11월23일 15시23분 ]

지난 30년 동안 <설악신문>은 많은 지역주민의 삶을 다뤄왔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통해 신문은 주민들과 함께 해 왔다.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하고, 힘든 일은 함께 격려하고, 슬픈 일은 함께 슬퍼해 왔다. 특히 신문은 지역주민의 인생을 보다 깊게 조명하는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돌아봐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 소중한 이야기이다. 각각의 이야기가 모여 지역 향토사라는 큰 강물을 이루고 있다.
 

북청사자놀음 기능보유자 김수석옹
1990년 7월 23일자 <속초신문>에는 북청사자놀음 기능보유자 김수석(당시 82세)옹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김씨는 1907년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죽평리에서 태어났다. 7대 독자였던 김씨는 12살 때 북청사자놀음 사자춤을 추기 시작해 14살 나이에 민요 ‘애원성’을 불렀다. 1.4후퇴 때 고향을 떠나 월남해 거제 피난민수용소를 거쳐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이발사를 하다가 속초에 정착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오징어배도 타고 나무를 해다 팔기도 했다. 속초 정착 다음해인 1957년 정월대보름 때 북청도청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고향의 사자놀음을 재현해 집집마다 돌며 악귀를 쫓아줬다.
다음해인 1958년 건립된 북청도청을 중심으로 속초에서 북청사자놀음 전승이 이뤄졌다. 196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북청사자놀음이 출품되어 다음해인 1967년 북청사자놀음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고, 김수석씨는 1971년 사자앞머리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김씨는 “북청을 비롯한 이북 출신의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처음 사자놀음을 재현한 곳임을 들어 속초가 사자놀음의 전승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 당시 고령으로 사자춤은 하지 못하고 대신 애원성 소리를 하거나 공연에서 대사 역할을 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사자탈을 들어 보이고 자신이 직접 만든 퉁소를 불어 보였다. 인터뷰 이후 김수석씨는 1997년 10월 17일 향년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자손도 없이 외롭게 살아온 김씨는 속초 실향민의 한과 그리움을 대변하는 ‘외로운 사자’였다.
 

4.19혁명 이후 속초읍장 지낸 김종률씨
1993년 5월 12일자 <설악신문>에는 4.19혁명 이후 속초읍장을 지냈던 김종률(당시 68세)씨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영랑동에 살고 있는 김종률씨는 3대째 지역에서 한의사를 한 김환기씨의 아들로 일제강점기 때 부친의 흥사단 활동을 위해 모임 심부름을 했다고 기억했다. 한국전쟁 중 속초가 수복되자 자신이 몸담은 부대가 속초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속초에 돌아와 자유당 시절 야당생활을 했다. 당시 3번이나 테러를 당해 동지들과 아예 사무실에서 합숙을 하며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이 집권한 후 1961년 1월 속초읍장에 선임되었다. 읍장 취임 후 수차례 중앙 부처를 찾아다닌 결과 설악산 관광협회를 정식 등록허가를 받아내고, 설악산 진입로 아스팔트 포장 공사를 진행했다. 휴일에도 자전거를 타고 읍내를 시찰해 나중에는 ‘자전거읍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읍장 6개월 만에 5.16 쿠데타로 사임하고 나서도 지역에서 야당생활을 계속 해왔다.
 

설악산과 속초 홍보 주역 최구현 작가
1997년 1월 6일자 <설악신문>에는 신년기획으로 사진작가 최구현씨의 삶을 기사로 실었다. 최구현 작가(당시 77세)는 고성 출신으로 일제 때 금강산에서 사진기사로 일했으며, 수복 후 속초에 정착해 시내에 승리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설악산 개발과 홍보에 크게 기여했다.
1956년 고 이달영씨와 같이 지뢰탐사 군인들과 함께 20일 동안 민간인들은 출입조차 할 수 없었던 설악산에 올라가 카메라에 설악산 비경을 담았다. 이때 찍은 설악산 비경으로 최씨는 이달영씨와 같이 1958년 최초의 설악산 관광화보집을 5백부 발간했다. 이후 1963년에는 화보집 <동해안과 설악산>을 발행했고, 1969년에는 최초의 설악산 칼라화보집 2백부를 발간해 배포했다. 최씨는 일제강점기 신흥사지를 찾아내어 설악산 일대 지명을 찾아내고 이름이 없는 곳은 직접 이름을 짓기도 했다. 육담폭포와 비룡폭포, 오련폭포, 집선봉, 문주담, 양폭, 음폭, 천당폭포, 천화대, 유선대 등도 최씨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최씨는 이달영씨와 함께 교통부장관을 찾아가 설악산 호텔을 건립토록 했으며, 극동항공 속초 취항도 이끌어냈다. 1966년에는 예총 속초지부장을 맡아 설악제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1998년 7월 13일자 <설악신문>에는 금강산 유람선 취항을 앞두고 금강산서 사진작가로 활동한 최구현씨의 회고 인터뷰가 실렸다. 금강산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최씨는 한국전쟁이 나자 필름과 사진을 모두 놔두고 그냥 몸만 빠져 나왔다.
최구현씨는 2012년 3월 1일 향년 93세로 작고했다. 2012년 3월 12일자 <설악신문>에는 고인의 행적을 기리는 기사가 실렸다. 최구현씨는 설악산 사진 이외에도 속초 바닷가 풍물 사진을 많이 찍어 속초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겼다.
 

자신 희생해 선원 21명 살린 유정충 선장
1990년 3월 1일 오후 2시 속초 선적 하나호가 제주도 서남방 해역에서 어로작업 중에 갑자기 닥친 돌풍과 집채만 한 파도에 전복되어 침몰됐다. 이때 유정충 선장은 선원 21명을 구명보트에 태워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은 가라앉는 배에 남아 “602호 하나호 침몰 중…”이라고 무선으로 긴급구조신호를 보냈다. 그가 보낸 긴급구조신호는 제주도 모슬포어업무선국에 수 초 간 수신되었다. 유 선장은 침몰하는 하나호와 함께 가라앉았지만 구명보트에 탄 선원 21명은 표류 12시간 30분만인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구룡포 선적 유창호에 발견되어 모두 구조됐다. 유 선장이 남긴 긴급구조신호로 구조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21명 선원도 목숨을 잃었 을 수도 있었다.
1990년 11월 12일자 <설악신문> 1면에는 고 유정충 하나호 선장의 동상 건립 소식이 실렸다. 그리고 2003년 1월 27일자 <설악신문>에는 ‘유정충 선장의 동상을 대접하자’라는 제목으로 당시 최용문 속초문화원장의 특별기고가 실렸다. 최 원장은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60만 어민장으로 치러진 속초의 고 유정충 선장의 동상이 우리들의 뇌리에서 망각되어가고 있어 안타깝다”며, “주변 건물에 에워싸여 숨 쉴 틈을 잃어가는 동상을 새로 조성하여 실향민 문화촌에 이전하자”고 제안했다. 금호동 속초시근로자복지회관 옆에 위치했던 유정충동상은 2005년 11월 23일 엑스포공원으로 이전됐다가 2018년 청호동 신수로 남단으로 다시 옮겨졌다.  2010년 2월 12일자 <설악신문>에서는 창간 20돌 특별기획으로 고 유정충선장의 행적을 다시 짚고 유가족의 이야기를 취재해 자세히 보도했다.
 

설악산 사랑과 의료봉사 힘쓴 이기섭 박사
1995년 9월 25일자 <설악신문>에는 서른번째 설악제 등산대회를 맞아 1966년 제1회 설악제 등반대회를 개최한 이기섭 박사(당시 83세)의 회고를 담은 특별기고문이 실렸다. 이씨는 제1회 설악제 등산대회 때 폭우로 천불동계곡이 범람해 등산객들이 봉정암과 양폭산장에 갇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첫 등산대회 때의 감격을 잊지 못했다.
1996년 12월 30일자 <설악신문>에서는 이기섭 박사와 설악의 인연을 자세히 다뤘다. 이씨는 1956년 이화여대사범대 산악부 등반에 참여해 처음 설악산과 인연을 맺고 1962년 이화여대부속병원장을 그만두고 속초로 이주했다. 1964년 설악산악회를 창립해 천불동계곡 등산로 개척에 앞장섰고, 1966년 제1회 설악제 등산대회를 개최했다. 1970년대에는 속초보건소장과 도립병원 의사를 지냈으며, 1989년부터 4년 동안 설악제위원장을 지냈다. 1993년 설악산 소공원에 산악인들과 함께 ‘산악인의 문’과 ‘산악인의 불꽃’을 조성했다.
특히 이기섭 박사는 현직에 있을 때도 의료봉사에 적극 나섰으며, 현직의사를 그만둔 1983년 이후에도 양양군 서면 서림마을까지 찾아가 무료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이씨는 <설악신문>과 인연이 깊다. 1996년 4월부터 다음해 6월 초까지 <설악신문>에서는 ‘이기섭 박사의 생활의학’ 코너가 개재되었다. 이씨는 친필로 쓴 원고지를 들고 매주 직접 설악신문사를 방문했다. 이기섭 박사는 향년 94세인 2006년 12월 25일 작고해 속초시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설악신문 30년, 다시 보는 그 시절’은 30회를 마지막으로 종료합니다.
1991년 7월 23일자 속초신문에 실린 김수석옹과 사자탈.
 

설악신문 (soraknews@soraknew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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