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 - 이철수의 판화집 중에서 -
- 이야기 하나 -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 불빛이 빨간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참 이상한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부터 인도 옆 철제 난간에 현수막 세 개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건강조사 홍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구 주택 조사 홍보용이다. 그 끝에 걸린 다른 하나는 문화 관련 홍보용 현수막이었다.
그런데 차량 한 대가 그 세 개의 현수막 앞에 서더니, 현수막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아! 공식 게시대에 걸지 않은 불법 현수막이라고 철거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관련 현수막 하나만 달랑 철거하고 차량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그렇구나! 내가 사는 곳에서는 문화는 아직도 ‘잡’이구나!
- 이야기 둘 -
40년 넘게 몸담고 살던 세상을 떠나 조금은 여유로운 세 번째 삶을 살면서 필자가 가진 새로운 습관 하나는 내가 사는 마을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일이다. 강의가 있거나, 회의가 있을 때 다른 일이 없어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날을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서서 목적지까지 걸어간다. 지난번에 가지 않았던 골목길을 찾아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재미가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나가나 가장 눈에 많이 뜨이는 것이 현수막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내가 마을의 가장 큰 화두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생각의 충돌이다.
한 동안은 ‘보존’에 관한 현수막들이 길거리를 도배하더니, 잠시 후에는 ‘개발’에 관한 현수막이 봇물 넘치듯 거리마다 펄럭대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내내 궁금했다.
둘 중에 뭐가 ‘잡’이지?
- 이야기 셋 -
오늘 뉴스에서 필자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과 부산의 단체장 선거에 후보를 내려는 여당의 당헌 개정 선거와, 완전히 다른 2개의 미래를 결정하는 미국대통령 선거의 흐름이었다. 먼 나라 이야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예상대로 당원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률로 당헌 개정이 결정되었다. 결국 명분과 실리에서 여당은 실리를 선택했다.
명분과 실리! 둘 중에 뭐가 ‘잡’이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을 ‘잡초(雜草)’라고 하고, 논밭에 난 잡풀을 ‘김’이라고 한다. 나는 논에서 벼일까? ‘잡’일까?
아니면 온갖 풀들이 자기만의 이름을 가지고 끊임없이 삶을 살아가는 들판에서조차 나는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진짜 ‘잡’일까?
햅쌀로 지은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섰는데도 몸이 춥다. 겨울로 가는 시계는 아직 한참이나 시침이 더 돌아가야 할 시점인데도 춥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아직 나는 ‘김’이기 때문이다.
김종헌
시인·설악문우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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