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문암1리 장재춘옹(1993.11.8.)
“임란 때 왜선이 만영바위에 부딪혀 좌초”
1920년 당시 문암진리로 불린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장재춘옹. 일본인들이 이곳을 문암진리라고 부르기 전에는 만개리라 불렸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마을 해안으로 들어오다 바다 밑에 있는 만영바위에 부딪혀 좌초됐다고 하여 만개리 또는 만초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38선 이북으로 6.25때 격전지였던 문암마을은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흘날에는 서낭당에서 마을치성을 드리고 3년에 한 번씩 음력 5월경 풍어제를 지낸다. 예전 풍어제는 삼일씩 밤을 새워가며 지냈는데 굿판이 얼마나 큰지 오봉, 인정, 삼포 등 인접마을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구경꾼이 몰려왔다. 마을에 있는 백도해수욕장은 예전엔 제일금강산해수욕장이라 불려 관광객들이 등산화를 신고 찾아왔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어렵게 살아온 주민들은 1966년 안정적인 어업활동을 위해 축항을 쌓는 운동을 벌였다. 장재춘옹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도청을 오르내리며 축항 축조운동에 앞장섰다. 그때 정부로부터 ‘이상어촌’으로 지정받아 80동의 근대식 주택을 지을 수 있었다.
고성 순포마을 어재조옹(1993.11.29.)
“4백년 전 함정 어씨 살기 시작”
예전부터 마을 둑 아래 순채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순포리’라 불린 삼포 1리에서 4백년째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어재조(77세)옹. 순포마을은 4백년 전 평안도 함정 어씨가 개척해서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국가중요민속자료 131호로 지정된 어명기가옥과 봉화가 올랐다는 봉수산이 있고,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고령토 출토로 파헤쳐진 성황당에서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에 치성을 드리고 있다. 어재조옹의 고증으로 발굴한 ‘순포지정다지기’가 강원도 민속경연대회에서 3위를 수상했다.
해방 이후 11년간 이장을 역임한 어재조옹은 6.25전쟁 당시 협조하지 않는다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몰매를 수없이 맞기도 했다. 한번은 국군 헌병대가 들이닥쳐 피난민들을 노역부로 쓰겠다고 하여, 맞아죽을 것을 각오하고 군막사로 찾아가 일등중사를 부여잡고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 있느냐”고 만류해, 이에 감동한 일등중사가 백배사죄했다고 한다.
고성 인정리 이덕균옹(1993.12.20.)
“고구마 재배법 전파한 고구마선생”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에서 4백여년간 12대째 살아온 이덕균(76세, 인정2리)옹. 마을의 역사를 상징하는 도문화재 78호 지정 북방식 기와집에서 8대째 살고 있다.
이옹은 33년간 교직에 몸담아온 ‘고구마선생’이다. 1951년 고성지역이 수복되면서 백촌국교 교실 1칸을 얻어 동광중학교의 전신인 101학도대가 수업을 시작했다. 이 무렵 주민들은 매일 기아에 허덕이며 구호물품에 의지했다. 동광중학교 교사로 있던 이덕균옹은 일본 명치대 농과대 시절에 배운 지식을 더듬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작물인 고구마 재배법을 가르쳤다. 고구마재배법이 전파되어 인정리 일대가 고구마밭으로 뒤덮였다.
인정리는 한일합방 당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는 ‘화정리’로 불렸다. 이덕균옹 집 앞 우물이 옛 마을 이름 ‘화정리’의 기원천이다. 옛날에 수성(간성) 원님이 이 마을을 행차해 이씨 집 앞 우물을 마시고는 “그 맛이 꽃향기와 같고 샘이 깊고 수량이 풍부하니 ‘화정’이라 함이 좋을 듯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정리는 매년 음력 정월 2일에 제종산 밑 치성당에서 마을 수호신에게 치성을 드린다.
고성 산학리 고익주옹(1994.2.21.)
“한일합방 전 날개달린 장사가 태어나”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는 마을 양옆으로 날개를 뻗은 듯 고성산과 노인산을 끼고 앞으로는 중뜰이라는 평원이 자리잡고 있어서 예로부터 장군이 날 형국을 하고 있다고 했다. 6백년 전 산학리에 정착해 27대째 살아온 제주 고씨 고익주(82세)옹은 한일합방 직전에 산학리에서 밀양 박씨 후손으로 날개 달린 장사가 태어났었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아기장사는 마을 방앗간에 있던 돌절구확을 집 앞에 옮겨 놓는가 하면 밀밭 위를 날아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한일합방이 된다는 소문이 나돌고 국운이 기울면서 집안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인두로 아기장사의 날개를 지져 죽였고 그 후 아기장사의 묘자리는 용마가 솟았다고 하여 ‘용소꾸미’라 하고, 용마가 넘었다는 고개가 ‘용너미고개’로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산학리는 일제 치하에 들어가면서 기운이 점점 쇠해졌는데 산학리가 장군이 날 형국이라고 하여 일본인들이 마을 좌우에 있는 두 산에 쇠기둥을 박아 산의 혈을 끊어 놓고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어구산의 기력을 약하게 하기 위해 산의 이름을 노인산으로 개칭했다. 고성산 꼭대기에는 봉화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산학리는 일제 강점기 열산리와 학산리가 통합되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지금도 열산현의 청사가 있던 자리는 말달리는 소리와 방울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어느 누구도 그곳에 집을 짓지 않고 있다고 한다.
양양읍 탁상연옹(1993.10.25.)
“병자년 폭우 주민 5백80명 사망·실종”
탁상연(72세)옹은 어릴 때 양양 남대천의 폭은 현재의 절반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당시는 시내 주요 도로가 소롯길이었고 군청 앞과 양양초교 사이 도로가 국도였다. 해마다 10월이나 11월이면 작살로 연어를 잡아먹곤 했다. 당시는 낚시라는 게 없었다. 놀이라고는 자치기나 자전거바퀴 굴리기 정도였고 과수원 서리도 재미있었다.
1936년 병자년 여름 장마를 잊을 수 없다. 그해 여름 사흘간 5백여mm의 폭우가 내려 남대천 구교가 무너지고 주민 5백80명이 사망·실종하는 참사가 있었다. 당시 탁상연옹은 15살 어린 나이였다. 이듬해 주민들이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길 옆에 세웠던 비석은 현재 현산공원내 비석군으로 옮겨져 있다.
양양 서면 상평리 김지용옹(1994.1.24.)
“20년 전 상평천에 은어 황어 연어 올라와”
일제강점기 강현면 사교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김지용(84세)옹은 병자년(1936년) 수해로 가옥과 전답을 잃고 서면 용소리로 이주했으며, 다시 6.25전쟁 후 상평리에 정착했다. 정착 당시 상평리는 주민이 현재보다 2배 많은 6백여 명에 달했고, 농사짓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김옹은 일제 강점기 때 유권자토지(면세 5원 이상을 내는 사람에게 주는 토지)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인공시절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자 양양광업소로 들어가 막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자신을 남쪽으로 내려 보내 간첩활동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숨어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복 후 김옹은 군정시절 서면 국민회장을 지내고 행정이양 후 서면 자유당 책임자로 활동했다.
서면 상평리 마을 앞 상평천(남대천 줄기)에는 20년 전만해도 은어, 황어, 연어가 올라왔는데, 임천보 설치 후에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없게 됐다.
양양 현북면 이상록옹(1994.2.14.)
“분단으로 현북면사무소가 2개”
현북면 대치리 태생인 이상록(74세, 하광정리)옹은 일제강점기 때 1년 과정인 서울전기학교를 졸업하고 평북 후창에 있는 동점변전소에서 6년간 근무했다. 해방 후 공산치하를 피해 고향 대치리에 내려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38선으로 남북이 나뉘면서 현북면은 남과 북에 면사무소가 두 개 존재했다. 이옹은 38선 이남 지역으로 강릉군에 편입된 현북면사무소에서 회계업무를 보았다. 수복이 되자 두 개의 현북면사무소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옹은 부면장을 지냈다. 당시 38선 이북은 38선 이남에서 제일 못 사는 사람들보다 사는 게 형편없었다. 현북면에는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똑똑한 사람들은 다 북으로 넘어가고, 이후 돈을 좀 번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옹은 부면장 시절 현북면 상광정리 학자 오정현 어른께 글씨를 부탁해서 강릉에 나가서 현판을 만들어 직접 달았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994년 1월 24일자 설악신문에 실린 양양 서면 상평리 김지용옹 가족사진. 1962년 장남 결혼식 후 집 앞에서 찍었다. 왼쪽 끝 양복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김지용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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