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으며, 실향민 역사도 70년을 맞았다. 지난 30년간 발행된 <설악신문>에는 속초 실향민의 사연과 삶의 이야기가 곳곳에 실려 있다.
첫 실향민 소식은 창간호 1면에 실렸다. 1990년 5월 28일자 <속초신문> 1면에는 실향민 도시 속초의 상징인 수복기념탑 모자상 사진 아래 함남 북청군 신창읍 만춘리 출신 실향민들의 단합대회 기사가 실렸다.
만춘리 출신 실향민과 가족 1백70여명이 1990년 5월 20일 동명항 매립지 공터에서 처음으로 단합대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속초와 고성, 서울, 부산 등만이 아니라 미국 LA,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만춘리 출신 사람들이 찾아와 참여하였다.
이날 북청군민 자녀로 구성된 북청사자놀이 전수팀이 사자놀이 공연을 펼쳤다. 26세에 월남한 김보배(당시 70세, 동해시 거주) 할머니는 “40여년만에 만난 친구들과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던 북청사자놀이를 우리 자식들이 하는 것을 보니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며칠만 피난 나와 있으면 되겠다 싶어…
1991년 3월 11일부터 1년 동안 <속초신문>에는 ‘그리운 내고향’이라는 제목의 연재기획으로 실향민들이 직접 전하는 고향이야기가 실렸다. 함흥 출신 화가 김광수, 고향이 그리울 때면 아바이마을을 즐겨 찾는다는 성진 출신 화가 김한, 북청군 신창읍 만춘리 출신 김철섭, 함주 출신 엄명덕, 영흥 출신 청호동노인회장 윤덕훈 등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1992년 3월 23일자 신문에는 연재 마지막으로 북청 출신으로 아바이마을에 사는 김형준씨(1914년생)의 가슴 아픈 사연도 실렸다.
“난 스물 한 살에 결혼을 했어. … 난 아이가 둘이었는데, 큰 아이가 8살 초등학교 1학년 댕기는 거 보고, 난 혼자 피난 나왔지.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몰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족 모두 데리구 나올라면 데리고 나올 수도 있었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알았으면 아무래도 데리고 나왔지. 난 며칠만 피난 나와 있으면 되겠다 싶어 아군들 따라 남하했지.…”
신문에는 실향의 아픔을 딛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꽃피운 이야기도 실렸다. 1993년 9월 27일자 <설악신문> 6면 추석 특집면에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성묘”라는 제목으로 동명동 천주교회 문프란치스꼬 씨가 보낸 장문의 기고문이 실렸다. 30년 전에 쓴 기고이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가슴뭉클한 이야기이다.
1970년대 초반 지금은 택지로 개발된 속초여고 뒤편에는 산소들이 많았다. 추석날 이곳에 성묘를 갔던 문씨는 20m 아래 떨어진 산소 앞에서 성묘를 마치고 한 청년은 퉁소를 불고 또 한 청년은 퉁소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걸 목격했다. 그 노래는 8.15 해방 후 북한에서 불려진 ‘밭갈이’라는 노래였다. 하도 신기해서 청년들에게 물어 그 사연을 들었다.
두 청년이 성묘를 한 산소는 자신들을 키워준 분의 산소였다. 두 청년은 형제로 고향 원산에서 초급중학교를 다니다가 1.4후퇴 때 동네 형 3명과 함께 피난을 내려왔다. 아버지는 인민군대에 끌려가고 같이 살던 할아버지는 아이들만 동네청년들에게 맡겨 피난을 내려 보냈다.
피난을 내려와 묵호에 도착했는데 동네형 3명은 국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졸지에 형제 둘만 남한땅에 남겨졌다. 형제는 1951년 봄 국군을 따라 속초에 올라와서는 비럭질(동냥)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휴전 후 어느 초겨울 아침에 중앙시장 부근에 나가 비럭질을 하다가 우연히 선생님을 만났다. 생면부지의 어린 형제에게 팥죽을 사 주신 선생님은 평안도 진남포 출신 실향민으로 당시 속초 어느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형제를 집에 데려다 같이 살면서 중학교 편입 시험을 보도록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갑작스런 공부가 싫은 형제는 강릉까지 도망갔다. 수소문 끝에 형제를 다시 집에 데려와서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결국 형제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중학교에 편입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국비로 운영되는 서울 체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1,2등으로 졸업한 형제는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국립체신대학을 입학했다. 그러나 형제가 대학교 2학년 다닐 때 선생님은 그만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나이 36살, 선생님은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다. 형제는 장례식이 끝난 후 뒤늦게 부음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선생님은 자식같은 형제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유서를 남겼다.
필자 문씨는 형제 중 한 명은 중앙정부의 국장으로, 또 한 명은 지방체신청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속초여고 뒤 산소는 형제들이 서울 인근 공원묘지로 이장해 갔다고 밝혔다.
실향민 망향동산·망향탑 기획연재
1995년 1월 2일자 <설악신문> 1면에는 “청진모래 실향민 가슴에”라는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는 1994년 12월 24일 아바이마을 청호동 청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함남 청진 고향모래 전달식 행사 소식을 전했다. 속초지구 이북5도민회가 동해시 소재한 ㈜서평건설이 분단 후 최초로 북에서 반입한 모래 1kg들이 2천포를 속초 실향민들에게 전달했다. 건설자재용 모래로 함경북도 청진군 수성천에서 채취한 것이다.
<설악신문>에서는 1995년 8월 14일자를 시작으로 5회 연속으로 속초 실향민 망향동산과 망향탑에 대한 기획 연재를 게재했다. 이 무렵 미시령로 확장과 관광개발사업으로 속초의 실향민 망향동산이 하나 둘 사라지던 때였다.
단천군민회 망향동산은 1996년 4월까지 완전히 철거하기로 예정된 상태였다. 1953년 단천군민회는 북한 비행기의 공습으로 사망한 단천출신 실향민의 시신을 거둔 것을 계기로 결성되어 1957년 영랑호변에 망향동산을 조성했다. 39년 만에 영랑호변 단천 망향동산은 사라졌다.
함흥시민회는 1957년 결성되어 1978년 11월 망향탑을 세웠다. 시민회 결성 때 <동아일보>에 함흥사람들은 모이라고 공고해 영랑호변 보광사 솔밭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함흥 망향동산도 미시령로 확장으로 이전 중이었다.
신포읍민회은 1965년에 결성되어 1971년 향원을 조성하고 1983년 망향비를 건립했다. 신포읍민회 향원은 지금도 미시령로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전 회장 최중구(당시 69세)씨는 “신포하면 명태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부두의 다릿발 끝에서 내려다보면 명태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영흥군민회 망향동산은 지금도 교동 현대아파트 뒤편에 있다. 1954년 군민회가 결성되어 1965년에 망향동산을 조성하고, 1979년 추석 때 망향탑을 세웠다. 회장 김두초(당시 76세)씨는 “생후 4개월 된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온 한스러움이 45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길주·명천 망향동산은 1962년에 조성되어 1971년 망향비를 건립했다. 2년 전인 1993년 미시령로 확장으로 고성군 죽왕면 인정리로 일부 옮겨가고 망향비와 묘 몇 기만 남아 있었다. 망향비에는 “갈래도 갈 수 없고 올래도 올 수 없어 한스럽다(恨 去不去 來不來)”라고 적혀 있었다. 길주·명천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 다음날에 모여서 고향 민속놀이를 함께 했다. 윷 대신 붉은 강낭콩의 한쪽에 금을 그어 표시하고 이를 천으로 짠 토시에 집어넣으며 놀았다.
1997년 9월 22일 <설악신문>에는 추석 다음날인 9월 17일 청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함남도민회 한마당잔치를 보도했다. 13년 만에 다시 열린 한마당잔치에는 함남 출신 실향민 5백여 명이 참석해 줄다리기와 노래자랑, 장기자랑 등으로 향수를 달래는 시간을 가졌다. 신문에는 이날 행사에 참가한 실향민 중에 최근 42일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실향민의 사연도 함께 소개됐다.
안동섭 함남도민회장은 “고향이라는 것은 잃어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실향민 1세대 중에는 아직도 향수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올해 고향흙이라도 나눠줄 때, 그 대단치 않은 것에도 감격하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언급한 고향흙은 1997년 5월 3일 수복기념탑 공원에서 열린 통일시민대회에서 나눠준 것이다. 이 행사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모아 온 흙으로 수복탑 옆에 주목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 때 속초시민의 통일 염원을 담아 심은 주목나무는 지금도 잘 크고 있는지.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997년 9월 22일자 설악신문에 실린 ‘함남도민회 한마당잔치’ 사진.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힘껏 줄을!”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다.
1995년 9월 18일자 설악신문에 실린 길주명천 망향비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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