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양양출신의 시인 정덕수가 작사하고 가수 양희은이 부른 대중가요 <한계령>의 노랫말처럼 백두대간 오색령(한계령)은 수많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사람과 말이 넘던 길로, 자동차가 달리는 길로 영동과 영서를 면면히 이으며 오늘도 그 흔적들을 아로새기고 있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1-30번지 해발 1,004m인 오색령(五色領)은 조선말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의 고본인 ‘동여도’에 고대로(古代路)라 표기돼 있으며 처음에는 소솔령(所率領)이라 불렸다고 한다. ‘선조 29년(1592년) 2월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영동으로 침입하면 이 영(嶺)을 넘을 것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이 지금의 오색령의 효시(嚆矢)다.
오색령은 1915년 일제가 침탈을 목적으로 만든 지도에 ‘한계령’이라 표기한 것을 고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인제군 북면 지명제정위원회가 한계령의 지명유례를 ‘영동과 통하는 오색이영의 낮은 영으로서 한계지역에 있다고 하여 한계령이라고 하나, 오색이영이라고도 함’이라고 당시 국무원에 보고한 것을 1961년 4월 22일 전국지명을 확정 고시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양양사람들은 오색을 ‘오색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다.
이렇게 오색지역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이어지던 이 고갯길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05년 동안 한계령으로 불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각양각색의 사연을 얹어 연신 실어 날랐다.
오색관광도로로 반세기 영화 누려
정부가 영동과 영서를 더 편하게 잇기 위해 1966년 국도 44호선 공사를 시작하면서 오색령도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공사는 총 연장 44.38km에 이르는 길을, 그것도 해발 1,004m의 정상까지 연결하며 1971년 비로소 완공됐다.
당시에는 남설악과 내설악을 연결하는 도로여서 ‘설악산 횡단도로’로 불렸다. 나라살림도 어려운 시기에 5년의 대역사에는 군인 3만명과 민간인 1만여명이 동원되면서 적잖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평생 한 번이나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남설악 오색령 길이 뚫리자, 금강산 다음으로 수려한 남설악의 가을단풍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오색사람들은 상가를 지으며 ‘관광양양의 약진’, ‘관광재원의 개발’ 등 지역관광 활성화를 염원하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가을관광명소로 발돋움시켜 나갔다.
오색이라는 지명처럼 오색단풍으로 유명한 이 길은 설악동과 함께 수학여행 경유지와 단풍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가을이면 천년고찰 낙산사와 의상대를 거쳐 주전골 등의 오색단풍을 보기 위해 최남단 제주에서까지 관광객이 배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올 정도로 각광받았던 단풍명소였다.
탄산온천과 산채 등으로 유명한 지금의 오색상가도 당시 모습 그대로라고 하니, 오색령 길은 산악지대에 기대 살던 지역을 30년 이상 호황과 번영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동~영서 잇는 넓고 높은 지름길
1990년 초반까지 오색령 길은, 국도 44호선 활성화로 영동에서 영서로 가는 가장 넓고 높은 지름길이었다. 당시 고성 진부령, 속초 미시령 길도 있긴 했지만, 역시 오색단풍이 절경이어서 많은 차량이 오갔다.
춘천을 오가는 대부분의 완행·직행·무정차버스들이 오색령 44호선 국도를 지나다니며 수많은 사람들과 사연을 실어 날랐다. 영동에서는 간혹 진부령을 이용해 백두대간을 넘는 버스도 있었지만, 춘천에서는 거의 오색령 길을 통해 양양과 속초, 고성으로 오고 갔다. 속초에서 출발한 버스는 양양과 오색에서 한 번 정차한 후 오색령 고개를 넘어 장수대-원통-인제-신남-홍천-북방을 거쳐 춘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완행버스는 길게는 5시간 이상, 직행버스는 4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멀었던 춘천 가는 길도 도로 확포장과 정비가 이뤄지고 무정차까지 생겨나면서 3시간 30분 정도로 좁혀졌다.
당시 버스가 7번 국도를 따라 오색에 다다르면 관광객들도 승차해 이내 좌석은 만원이 된다. 비릿한 생선 냄새와 산나물 향기가 교차하는 완행버스 안의 풍경은 5일 장터처럼 정겨웠다. 이어 오색령을 넘어 원통과 인제에 이르면 입석이 이뤄져 버스 통로까지 승객들로 꽉 찼다.
오색령 길은 버스 차창으로도 오색단풍과 겨울 설산 등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 설악산의 고운 자태를 보여줬다. 남설악 주민들의 삶도 빠르게 변화하며 관광중심지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오색령 길 중에서 가장 힘든 고개로 불리는 빨닥고개를 원만하게 통과하기 위해 지난 2009년 남설악 터널이 개통하면서 오색령 길은 더 빨라졌다. 1971년 확장한 오색령 길에 38년 만에 터널까지 뚫린 것이다.
하지만, 미시령 도로에 밀리고 2017년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수도권과 90분대로 개통하면서 오색령 길은 가을 한철만 제외하고는 한산한 모습으로 과거 영화를 추억으로만 회상하고 있다. ‘양양사람’ 안에 ‘오색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험준한 백두대간 오색의 산악지대를 꿋꿋하게 지켜온 오색주민들은 쇠락해가는 오색령 길을 그냥 바라만 볼 순 없어, 하늘 관광 길인 케이블카 설치를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다.
오색에서 나고 자란 정준영 오색2리 이장은 “사람과 길은 서로 뗄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것을 산악에 살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느낀다”며 “오색령 길이 다시 내달릴 수 있는 산악관광 인프라가 조성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빈다”고 말했다.
김주현 기자 joo69523@hanmail.net
눈 덮인 오색령은 인생역정을 담아내듯, 굽이진 고갯길이지만 언제나 주민들의 삶과 함께한다.
1971년 오색관광도로 개통식을 축하하는 양양사람들.
하늘에서 본 현재의 오색상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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