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잼버리대회를 앞둔 1991년 7월 고성 명파리에 원자력발전소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전 추진 첫 소식은 1991년 7월 22일자 <속초신문> 39호에 실렸다. 당시 한전에서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지역에 원전 입지 타당성 조사를 위해 지질조사 및 측량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고성 명파리 주민들은 7월 14일 주민회의를 열어 원전 건설을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마을에 ‘명파리 원전검토 즉각 중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정부 부처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어 7월 19일에는 고성군 현내면 대책위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원전 반대운동에 들어갔다.
전 세계적으로 핵 공포를 불러온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5년밖에 안 지났고, 전년도인 1990년 11월에는 핵폐기장에 반대해 안면도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속초신문>에서는 원전반대 주민대책위 결성 소식을 전하는 한편, 8월 5일자 제40호 신문 사설을 통해, “정부와 한전 당국이 근시안적인 비밀주의적 행정에서 탈피하여 앞날의 통일을 대비한 관광권 개발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우리 지역을 원전 후보지에서 제외시킬 것”을 요구했다.
세계잼버리대회 중 고성주민들 “원전 반대”
8월 3일 고성군 대진어판장에서는 주민 1천5백여명이 참여해 처음으로 원전건설 결사반대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5일 후인 8월 8일부터 보름간 고성 신평리에서 제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주민들 사이에서는 축제의 열기는 찾아보기 어렵고, 원전 추진 문제로 크게 격앙되어 있었다. 축제 기간 중인 8월 11일에는 고성군 5개 읍·면 이장단이 모여 고성군 원전 반대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는 8월 19일 간성읍 공설운동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고성경찰서에서 고성군의원들이 동력자원부장관 면담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집회 허가를 불허했다. 8월 18일 경찰의 탄압에 항의해 현내면 이장 16명이 이장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8월 23일 동력자원부 장관은 고성군의원과의 면담 자리에서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에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바가 없다”면서도 “한전에서 명파리가 원전 입지로 타당한 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예비조사를 시행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8월 25일에는 고성군 공무원들이 반상회에 참석해 “명파지역 원전 설치는 정부에서 검토한 바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돌렸다. 그러나 원전반대 대책위는 7월 10일 동자부장관이 KBS와 대담에서 “남북통일에 대비해 휴전선 부근의 발전소 건설계획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한 테이프를 입수해서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원전 기초타당성 조사를 전면 백지화할 것을 요구했다. 고성경찰서에서는 9월 9일 현내면 원전반대 대책본부에서 원전 반대 유인물 8백여 매를 반정부 성격의 유인물이라며 압수해 가기도 했다.
고성·양양 핵폐기장 후보지 발표에 반발
이 상황에서 핵폐기물 처분장 건설 의혹까지 제기되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9월 17일 강릉관광호텔에서 ‘방사성폐기물 처분에 관한 영동지역 공개토론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 영동지역 주민 대표 토론자로 고성군 주민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전의 예비조사 관계자의 입에서 명파리에서 까치봉까지 3.2km의 암반을 뚫어 굴을 만들 계획이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고성주민 2백여명이 농성을 벌이는 바람에 강릉 토론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9월 24일 고성군 공설운동장에서 4천여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핵발전소 건설반대 고성군민 결의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핵발전소 건설계획 완전 백지화를 위해 결사항쟁을 밝히고 거리행진을 벌였다. 집회에 참가한 한 주민은 과격시위를 이유로 강원도경 수사요원들로부터 인격적인 모욕을 듣는 강압적 수사를 받기도 했다.
원전과 핵폐기장 추진은 단순히 의혹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1년 10월 4일 과기처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핵폐기물 처분장 후보지로 고성과 양양을 포함해 전국 47개 지역을 발표했으며, 12월 27일에는 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에서 강원도 고성과 양양을 포함해 전국 6개 지역을 핵폐기물 처분장 후보지로 발표했다. 이 중 한 곳을 그 해 말까지 최종 대상지로 선정하고 과기처에 보고해 지역 협의에 들어갈 방침이라고 했다.
이 발표가 나가자 고성과 양양에서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발표 다음날인 12월 28일에는 고성군 주민 1백여명이 고성군의회 항의 농성을 시작했으며, 29일에는 고성군 교회들이 나서서 노상 연합예배를 가졌다.
양양에서도 핵폐기장 반대가 거세게 일어났다. 후보지 발표 사흘만인 12월 30일 ‘양양군 핵폐기장 건설반대추진위’가 결성되어 다음날인 12월 31일 1천5백여 명의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반대궐기대회를 가졌다. 다음해인 1월 5일에는 3천여명의 양양군민이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이고 강릉~속초간 국도를 2시간 동안 점거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주민들의 항의시위가 이어지자 정부는 1992년 2월 26일 핵폐기장 최종후보지 결정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정부는 1994년 12월 서해안 굴업도를 핵폐기장 후보지로 선정했으나 주민반대와 지질조사에 따른 부적합으로 다시 폐기했다.
원전과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계기로 고성지역에서는 주민들이 환경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해 환경단체인 고성녹색사랑회와 현내면자연보호회를 결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1996년 고성주민 4천여명 반핵 궐기대회
원전과 핵폐기장 건설 문제는 4년반이 흐른 1996년 1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96년 1월 9일자 <한겨레신문>에 “통일전망대 근처에 10여기의 원전과 폐기물처리시설을 포함한 대규모 원전단지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이에 고성군에서는 군의회와 28개 사회단체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1996년 1월 16일 설악신문사에서는 고성 현내면자연보호회 사무실에서 원전단지 추진과 관련해 긴급 주민좌담회를 개최해 지면에 실었다. 속초에서는 3월 6일 속초시지역개발연구소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속초시반핵대책위’를 결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속초의 사회단체도 원전 반대에 함께 가세해 ‘금강·설악 반핵대책위위원회’를 결성해 반대운동에 나섰다.
3월 8일에는 고성군반핵대책위 주최로 4천여명의 지역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성공설운동장에서 고성군민 반핵궐기대회가 열렸다. 어민들은 조업을 포기하고 상가들도 문을 닫는 등 온 고성 주민들이 나서서 열띤 분위기속에 집회가 열렸다. 주민들은 “대규모 핵단지 건설을 즉각 백지화하고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에너지정책을 수립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간성시외터미널까지 1.5km를 걸어 가두시위를 벌였다.
곧 이어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모든 후보들이 원전 백지화를 내세웠다. 그리고 6월 11일 고성군의회는 중앙부처와 한전으로부터 고성지역에는 원전과 폐기물처분장 건설계획이 없다는 답변서를 받았다. 이에 금강설악 반핵대책위는 원전 완전 백지화를 거듭 촉구했다.
이후 원전과 핵폐기장 문제는 잠잠해졌으나 2001년 이후 다시 핵폐기장 후보지로 양양과 고성이 수차례 거론되어 주민들이 반대했으며, 2005년에는 핵폐기장 유치를 둘러싸고 양양에서는 주민 간에 갈등도 빚었지만 결국 주민반발로 신청이 부결되었다. 핵폐기장 건립 논란은 유치를 희망한 자치단체의 주민투표를 거쳐 2005년 11월 경북 경주에 중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방폐장)이 들어서기로 결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지방화시대 원년이라는 1991년부터 시작된 원전과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14년 동안 설악권 최대의 주민운동으로 진행되었으며, 환경문제에 대한 주민 각성의 큰 계기가 되었다.
엄경선 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1991년 8월 3일 열린 고성 원전반대 최초 집회 사진(속초신문 1991년 8월12일자 41호 게재).
1996년 3월 8일 열린 고성 반핵궐기대회(설악신문 1996년 3월 18일자 251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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