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 토성면 천진우체국 옆, ‘블랭크스 서프보드 디자인’. 이곳은 허석환 씨가 운영하는 서핑숍이며, 그의 아내인 애니메이션 작가 이정희 씨의 작업실 ‘세컨더리 액션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이정희 작가는 작년에 고성군의 청년창업 지원으로 기존에 운영하던 서핑숍 한쪽에 작업실을 열었다.
40대 초반인 허석환·이정희 부부가 고성에 온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이들 부부는 이전에는 서울에 살던 직장인이었다. 이정희 씨는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에 종사했고, 허석환 씨는 패션업계의 마케터였다. 이들은 전도가 밝은 편이었지만 쉼 없이 돌아가는 업무에 지쳐갔다. 직장인의 과잉노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오던 이들 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도 가평으로 귀농했다.
가평에는 이정희 씨의 부모가 농사를 짓고 있어서 이를 활용한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1년도 채 되지 않아 가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씨 부부는 가평에서 부모님 집을 고쳐드리고 사업을 추진하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썼고 거의 빈털터리인 상태로 고성에 왔다.
왜 고성이었을까? 부부는 당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날 때면 전국 여러 곳을 여행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찾은 고성의 바닷가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특히 이 씨는 어릴 적 외가가 속초에 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친근함이 남달랐다.
고성군 창업 지원으로 희망 품어
고성에서 이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죽왕면 가진이었다. 이곳은 유동인구가 적어 서핑숍 운영이 쉽지 않았다. 서핑 관련 일을 한다고 하면 흔히들 집에 돈이 많은 젊은이가 여름에만 일하고 겨울에는 놀러 다니며 여유롭게 생활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들 부부는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가진리에서는 8개월 동안 가게를 운영하다가 접었고 다시 그들은 지금의 천진우체국 옆자리로 옮겨야만 했다.
고성에 온 이후로 허석환 씨는 생계를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화려한 패션업에서 일했던 허 씨는 시간이 날 때면 허름한 체육복을 입고서 목공일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도 제가 패션업계 종사자였는지 모를 겁니다.”
허 씨 부부는 자영업자이기에 고정된 수입이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번다. 서프보드 디자인, 민박 운영, 목공일, 애니메이션 외주 작업 등등 두 사람이 여러 방식으로 가게의 수입을 보충하고 있다. 이 부부의 경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무일푼이었던 4년 전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자영업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아직도 내일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상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 부부는 빚을 내지 않고 형편에 맞게 사업을 하려고 했기에 대출을 갚으려고 고생할 필요는 없다.
부부의 수입원 중 민박은 저렴한 비용을 책정해 우연히 한 번 왔던 이가 다시 올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부부는 처음에는 주변 민박들이 받는 만큼 숙박비를 받았는데 어느 날 방침을 바꿨다. 허 씨가 한번은 제주도 민박집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민박집은 식사를 제공하면서도 성수기와 비수기 구분 없이 사시사철 저렴한 곳이었다. 허 씨는 그곳 주인이 고객과 술도 한 잔 기울이며 대화도 나누는 등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곳을 경험한 후 허 씨는 숙박비를 기존보다 확연히 저렴하게 책정했다. 이후 허 씨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은 재방문율이 늘면서 조금씩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나고 있다.
서프보드 디자인은 부부가 협업한다. 남편인 허석환 씨가 고객에게 맞는 형태의 보드 외형을 정하면 아내인 이정희 씨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외관에 멋스러움을 더한다. 이렇게 디자인된 보드는 외주를 통해 제작이 이뤄진다.
이 씨가 운영하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아직 뚜렷한 수입은 없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작이 얼마 되지 않은 만큼 그는 상당히 의욕적이다. 서울에서 살 때는 이 씨가 남편보다 수입이 많았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 이 씨는 자신의 전문 영역을 고성에서는 크게 살리지 못해왔다. 애니메이션 외주 일도 고성에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회사가 많지 않았고 지역에서 이런 일을 하는 회사도 없어 막막함을 여러 번 느꼈다. 그러나 작년에 고성군의 창업 지원으로 ‘세컨더리 액션 스튜디오’를 열면서 이 씨는 희망을 품게 됐다.
“민박을 운영하며 수건을 빨다가 제가 잉여 인간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과연 제가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걱정도 했었죠. 하지만 스튜디오 창업을 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돼 기쁘네요. 의뢰받은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이제는 제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릴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되네요.”
마을 주민들과 ‘천진서핑잔치’ 열어
이들 부부는 앞으로 자신들이 하는 사업 외에 지역에 관한 관심을 더욱 넓혀 나갈 예정이다. 2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과 ‘천진서핑잔치’를 해오고 있다. ‘천진서핑잔치’는 플리마켓도 열고 서핑도 즐기고 청소도 하면서 지역주민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마을 잔치이다. 허석환 씨는 앞으로 ‘천진서핑잔치’에 더해 영화제 개최도 염두에 두고 있다. 부부는 천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쉼 없이 안정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빠르게 지역사회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들 부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고성 바닷가에 사는 것에서 행복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바다가 가깝다는 것,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시간 활용이 좋다는 점은 서울에서는 누리지 못한 것들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이정희 씨의 눈빛은 서울을 떠나 고성에 정착한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광호 기자 campin@hanmail.net
허석환·이정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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