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황금연휴 마지막 날 청초호 수변공원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마지막 휴일을 즐겼다. 이곳 청초호변에서 설악산 너머로 저무는 석양이 호수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니 속초는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청초호변에서 설악산 너머로 지는 아름다운 석양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청초호 유원지 북쪽 농협하나로마트에서 호수 쪽 길 건너 교동 1024-1 부지에 41층 876실의 레지던스호텔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 초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청초호 유원지 북쪽 호수변은 물론이고 남쪽 유원지에서도 호수 너머로 보이는 설악산 조망이 가리게 된다.
■대법원 “유원지 영리목적 개발 안 돼” 판결
청초호유원지 내 고층 대규모 호텔이 들어서는 것과 관련해 판단의 준거가 될 만한 대법원 판결이 있다. 지난해 3월 20일 대법원은 지난 2011년 제주 서귀포시 토지주 4명이 제주도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수용 재결처분 취소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대법원은 “유원지는 광장, 공원, 녹지 등과 함께 공간시설 중 하나로서 ‘주로 주민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오락과 휴양을 위한 시설”이라며, “예래휴양형주거단지는 고소득 노인층 등 특정 계층의 이용을 염두에 두고 분양 등을 통한 영리 추구가 그 시설 설치의 주요한 목적이기에 공공적 성격이 요구되는 도시계획시설인 유원지와는 거리가 먼 시설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 판결로 70% 진행된 총 5조원 규모의 예래휴양단지 유원지개발사업은 전면 중단되었다. 제주도는 토지소유주들에게 토지를 돌려줘야할 상황에 처했으며, 개발업체로부터도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다. 그리고 분양형 숙박시설이 포함한 10여개의 다른 유원지 사업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다. 한마디로 유원지를 숙박단지로 조성하는 제주도 관광개발 사업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유원지 기능 마비시킬 초고층 대형 영리시설
청초호유원지에 41층 876실의 레지던스호텔이 들어서는 것은 위 판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단 레지던스호텔은 수익형 분양호텔로 대법원이 규정한 영리 추구가 목적인 주거형 숙박시설로 주민의 복지 향상이라는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다. 호수변에 조성된 유원지의 생명은 수려한 경관과 쾌적한 자연환경이다. 호수에 인접해 41층의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청초호의 아름다운 경관과 설악산 스카이라인이 훼손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해당 부지인 교동 1024-1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철새도래지인 청초천하구와 맞붙어 있어 각종 소음과 자동차 매연, 주변 녹지 훼손으로 철새도래지 피해는 불가피하다. 청초호유원지 조성과정에서 철새도래지의 보존이 최고의 쟁점이 되었다. 지금도 유원지를 조성한 속초시는 철새도래지를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미 대부분의 건축물이 들어선 유원지 남단은 주말이면 심한 교통난을 겪는 공간이 되었다. 청초호유원지를 조성하던 1997년 속초시가 분양 수익을 올리기 위해 시설물이 들어설 부지를 자연녹지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변경하면서 건물 밀도를 높인 것도 교통난에 한 몫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또 876실 규모의 초대형 숙박시설이 들어서면 그 좁은 도로에 수백대의 자동차가 더 늘어나게 된다. 쾌적한 자연환경을 유지해야하는 청초호 유원지는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유원지 조성에서 식당이나 숙박시설은 유원지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한 부수시설이지 유원지의 핵심시설이 아니다. 청초호유원지도 대규모 숙박단지로 전락해 유원지 본래의 공공적 기능을 상실하고 주변 환경도 훼손된다면 제주도 예래휴양단지와 같이 위법시설로 몰릴 수도 있다.
■청초호유원지 층수 제한은 살아있다
지금 41층 초고층호텔이 들어설 부지가 고도제한구역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되고 있다. 속초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청초호수변에 41층 호텔 건립을 허가해 주겠다며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난 5월 9일 입장발표를 통해 “도시계획법 상 유원지에는 고도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만약 이대로라면 지금까지 층수제한을 적용받아온 청초호변 유원지내 모든 시설물들이 고층으로 들어서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청초호유원지는 조만간에 빌딩숲에 둘러싸여 갇혀 버리게 될 것이다.
과연 유원지에서는 고도제한을 할 수 없는가? 도시ㆍ군계획시설의 결정ㆍ구조 및 설치기준에 관한 규칙 제2조에 따르면 도시계획시설인 유원지는 시설결정을 할 때 중요한 세부시설에 대한 조성계획을 함께 세우고 건축물의 건폐율과 용적률 및 높이의 범위를 결정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속초시도 지난 1993년 승인받은 청초호유원지조성계획에 모든 시설물의 건폐율과 용적률, 층수를 결정해 고시했다. 지금까지 수차례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시설물의 층수 제한이 상향조정되는 변동은 확인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11일 변경 고시된 청초호유원지조성계획에는 청초호유원지 시설물 190개 중 주차장과 도로, 파고라, 완충녹지와 호안, 조각물을 제외한 181개의 시설물 모두 제한층수가 지정되어 있다. 상징탑은 15층, 문제의 휴양시설 부지는 12층, 다른 숙박 휴양시설 20곳은 7층, 식당 등 편익시설은 3~5층으로 5층이 109곳, 4층이 30곳, 3층이 17곳, 야외음악당과 화장실, 매점은 1층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 아울러 각 부지의 시설규모와 층수를 초과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지금 속초도시관리계획(청초호유원지 조성계획)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해당 부지는 건물 높이 12층으로 제한된 휴양시설 부지이다. 당초 해당부지는 12층 제한을 조건으로 감정평가를 통해 토지가격이 결정되어 공사를 맡은 업체에 대물변제로 매각이 이뤄졌다. 건물의 용적률은 같다고 해도 12층 제한부지에 41층을 짓게 된다면 엄청난 특혜가 주어지는 일이다.
유원지내 시설의 규모와 층수를 제한하는 것은 유원지로서의 기능을 살리고 쾌적한 환경과 경관을 위해 꼭 필요한 행정조치였기 때문에 23년 동안 적용되어왔으며, 지금도 명문화한 계획으로 살아있다. 유원지에는 높이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고 발표한 속초시는 23년 동안의 유원지 관리 행정을 모두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졌다.
■고밀도 숙박시설 밀집이 관광속초 미래인가
지금 속초는 대형 숙박시설 건설 붐이 일고 있다. 주로 속초시가 매각한 금싸라기 땅에 세워지는 고층 건물들이다. 속초 최고의 해안 절경지라 평가받는 외옹치 언덕 위에는 롯데에서 총 4백31개 객실규모로 호텔과 콘도 등 복합리조트를 짓고 있다. 바다 조망이 뛰어난 대포항 매립지에는 20층 556실 규모의 호텔이 올해 8월 문을 열 예정이다. 속초시내 청초호변에는 443실 규모의 20층 호텔이 공사 중이다. 이 세 곳은 모두 속초시가 매각한 땅에 지어지고 있다. 추가로 조양동 일대에는 24층 572실 규모의 호텔과 20층 492실 규모의 오피스텔 건축도 추진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몇 년 내로 2천 객실 이상이 속초시내에 새롭게 추가된다. 굳이 12층 층수제한까지 풀면서 청초호유원지에 876실의 초고층 대형숙박시설을 유치해야할까?
숙박시설이 밀집하면서 파생되는 경제적 효과도 있지만, 희생도 만만치 않다. 고층건물로 관광지로서의 경관을 훼손한다면 관광객들이 속초를 찾아올 이유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관광산업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극화되면서 지역의 소규모 숙박업체들도 큰 타격이 예상된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산도 바다도 호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유원지라면 굳이 환경훼손의 오명을 무릅쓰고 자연호수 청초호 20만㎡를 매립해야 했을까? 난개발을 막고 쾌적한 관광자원을 보존해야할 속초시가 오히려 난개발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엄경선 설악닷컴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난 5월 8일 오후 해 저물 무렵 청초호유원지 남쪽에서 바라본 호수와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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